대한민국은 더 이상 스스로를 과시해야만 존재를 인정받는 나라가 아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력, 제도화된 민주주의, 국제사회에서의 실질적 영향력은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다. 우리는 과거의 침략과 지배의 치욕을 ‘고대사의 과장된 영광’으로 보상받지 않아도 되는 단계에 도달했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역사에 대한 성숙한 태도다.
최근 일부에서 제기되는 환단고기 재평가 주장은 이러한 흐름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 문제는 해석의 다양성이나 학설 간 경쟁의 문제가 아니다. 환단고기는 역사학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기준—전승 계통의 확인, 문헌 비판, 고고학 및 동시대 사료와의 교차 검증—을 충족하지 못한 문헌이다. 고려·조선 시기의 어떤 기록에서도 언급되지 않으며, 언어와 개념은 해당 시대와 구조적으로 맞지 않는다. 주류 역사학계가 이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이념이 아니라 방법론 때문이다.
그럼에도 환단고기에 대한 비판은 종종 ‘식민사관’이라는 정치적 언어로 되받아쳐진다. 식민사관은 분명 비판되어야 할 역사 해석이다. 그러나 그것이 검증 불가능한 문헌을 옹호하는 면허가 될 수는 없다. 사료의 진위를 따지는 문제를 연구자의 정치적 성향이나 도덕적 정체성의 문제로 전환시키는 순간, 학문적 토론은 중단되고 신념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학문은 동기를 묻기 전에 증거를 묻는다.
이 문제는 한국만의 특수한 현상도 아니다. 영국에서도 아서 왕 실존설은 오랫동안 대중적 상상력을 자극해 왔지만, 국가의 공식 역사나 교육에서 사실로 채택된 적은 없다. 독일은 나치 시절 고대 게르만 신화를 정치적으로 동원한 결과가 학문과 사회를 어떻게 파괴했는지를 뼈아프게 경험했고, 그 이후 국가 정체성과 역사 연구의 분리를 철칙으로 삼아왔다. 프랑스와 아일랜드 역시 켈트 문화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초문명·초제국 서사는 단호히 배제한다. 강한 민주국가일수록 재야 학설은 문화의 영역에 두고, 역사학의 기준은 엄격히 지킨다.
우리가 비판해온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 왜곡 역시 결론을 먼저 정해두고 사료를 동원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본질은 동일하다. 남의 날조를 비판하면서 우리 스스로 검증 불가능한 서사를 국가적 자존심의 이름으로 옹호한다면, 학술적·도덕적 우위는 즉시 사라진다. 이는 단기적인 감정 해소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국제적 신뢰를 소진하는 길이다.
윤석열 정부를 추종하는 극우 정치 세력에 대한 비판은 정치의 영역에서 정당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 비판이 역사학 자체의 기준과 정체성까지 오염시키는 방식으로 확장될 때, 역효과는 불가피하다. 역사학은 정치적 무기가 아니라 공공의 신뢰 위에 서 있는 학문이다.
강한 국가는 과거를 과장하지 않는다. 불편한 역사도 감당할 수 있을 때, 그 국가는 존중받는다. 대한민국은 이제 고대사의 신화화에 기대지 않아도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환단고기 재평가와 같은 정치적·감정적 유혹에 거리를 두는 일은, 역사학을 지키는 일인 동시에 이 사회의 성숙함을 증명하는 길이다.
포사이트의 영국 이야기
<대한민국은 이제 신화가 아닌 역사로 말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스스로를 과시해야만 존재를 인정받는 나라가 아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력, 제도화된 민주주의, 국제사회에서의 실질적 영향력은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다. 우리는 과거의 침략과 지배의 치욕을 ‘고대사의 과장된 영광’으로 보상받지 않아도 되는 단계에 도달했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역사에 대한 성숙한 태도다.
최근 일부에서 제기되는 환단고기 재평가 주장은 이러한 흐름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 문제는 해석의 다양성이나 학설 간 경쟁의 문제가 아니다. 환단고기는 역사학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기준—전승 계통의 확인, 문헌 비판, 고고학 및 동시대 사료와의 교차 검증—을 충족하지 못한 문헌이다. 고려·조선 시기의 어떤 기록에서도 언급되지 않으며, 언어와 개념은 해당 시대와 구조적으로 맞지 않는다. 주류 역사학계가 이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이념이 아니라 방법론 때문이다.
그럼에도 환단고기에 대한 비판은 종종 ‘식민사관’이라는 정치적 언어로 되받아쳐진다. 식민사관은 분명 비판되어야 할 역사 해석이다. 그러나 그것이 검증 불가능한 문헌을 옹호하는 면허가 될 수는 없다. 사료의 진위를 따지는 문제를 연구자의 정치적 성향이나 도덕적 정체성의 문제로 전환시키는 순간, 학문적 토론은 중단되고 신념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학문은 동기를 묻기 전에 증거를 묻는다.
이 문제는 한국만의 특수한 현상도 아니다. 영국에서도 아서 왕 실존설은 오랫동안 대중적 상상력을 자극해 왔지만, 국가의 공식 역사나 교육에서 사실로 채택된 적은 없다. 독일은 나치 시절 고대 게르만 신화를 정치적으로 동원한 결과가 학문과 사회를 어떻게 파괴했는지를 뼈아프게 경험했고, 그 이후 국가 정체성과 역사 연구의 분리를 철칙으로 삼아왔다. 프랑스와 아일랜드 역시 켈트 문화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초문명·초제국 서사는 단호히 배제한다. 강한 민주국가일수록 재야 학설은 문화의 영역에 두고, 역사학의 기준은 엄격히 지킨다.
우리가 비판해온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 왜곡 역시 결론을 먼저 정해두고 사료를 동원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본질은 동일하다. 남의 날조를 비판하면서 우리 스스로 검증 불가능한 서사를 국가적 자존심의 이름으로 옹호한다면, 학술적·도덕적 우위는 즉시 사라진다. 이는 단기적인 감정 해소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국제적 신뢰를 소진하는 길이다.
윤석열 정부를 추종하는 극우 정치 세력에 대한 비판은 정치의 영역에서 정당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 비판이 역사학 자체의 기준과 정체성까지 오염시키는 방식으로 확장될 때, 역효과는 불가피하다. 역사학은 정치적 무기가 아니라 공공의 신뢰 위에 서 있는 학문이다.
강한 국가는 과거를 과장하지 않는다. 불편한 역사도 감당할 수 있을 때, 그 국가는 존중받는다. 대한민국은 이제 고대사의 신화화에 기대지 않아도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환단고기 재평가와 같은 정치적·감정적 유혹에 거리를 두는 일은, 역사학을 지키는 일인 동시에 이 사회의 성숙함을 증명하는 길이다.
1 week ago (edited) | [Y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