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걸을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

청년은 6.25 전쟁이 발발한 당시 23세 육군사병이었다.
20대 초반의 청년은 전쟁 한 해 전 군입대를 하루 앞두고 면사무소안에 마련된
입대예정자 이발소에서 마치 스님처럼 머리를 깍은 후,
마지막으로 식사를 위해 가족들과 둘러 앉았을 것이다.
연로하신 부모님과 큰형, 둘째누나, 여동생, 막둥이 남동생과의
생사를 알 수 없는 길로 떠나는 가족 일원의 마지막 식탁에
4살 많은 둘째누나는 쌈짓돈을 털어 인근시장 푸줏간에서 사온
작은 한 덩이의 쇠고기에 무, 파를 썰어넣고 오랜만에 정부미가 아닌
하얀 이밥에 뜨끈한 국이라도 끓여 아침을 먹여 보냈을 것이다.
오전 10시경, 사이렌이 울리며 군용트럭이 입영자들을 태우기 위해
도착했으니 모이라는 확성기에 실린 마을 이장의 바튼 목소리가 울려펴졌다.
늙으신 노모는 늘 어미를 걱정했던 살뜰했던 둘째 아들의 손을 잡으며,
“집은 성과 누이가 있응께 아무 염려말고 몸 건강히 잘 다녀 오그래이!”
6살 많은 큰형은 말 없이 어깨를 토닥여 주었고,
둘째누나는 정지(부엌의 충청도 사투리)에서 행주치마로 눈물을 훔쳤다.
10살 어린 동생들은 “성아야! 그러면 몇 밤 자면 집에 오나?” 떠나는
그의 등뒤에 대고 연신 물었다.
“형이 돈모아서 휴가나오믄 운동화 사줄께! 형, 누나 말 잘 듣고, 공부열심히 하고 있어라!”

입대한지 이듬해인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선전포고 없이
북한은 소련제 전투기와 T-34 탱크, 기관총을 무차별로 난사하며
무방비의 서울을 기습하여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다.
낙동강까지 밀린 국군과 UN군은 같은 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28일 서울을 탈환하고 북진을 하는 잠시 승리감을 맞보았으나,
이내 한 달 만에10월 19일 중공군 26만 여명의 병력이 압록강을 건너
북한군을 지원하여 전세는 재역전된다.
12월 31일 중공군의 대대적인 3차공세(신정공세)로
1951년 1월 4일 서울을 포기하고 후방으로 후퇴한다.
전력을 가다듬은 국군과 UN군은 1951년 1월 25일을 기하여
일제히 반격작전을 개시하여, 3월 15일 드디어 중공군의 4차공세를 격파하면서
서울을 재탈환하고, 3월말에는 38선까지 회복한다.

이후 중공군의 지속적이며 끈질긴 공세는 계속되었고,
서부전선(개성~화천)과 동부전선(양구~인제)의 피를 말리며 낮과 밤마다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말그대로, 고지전이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전 까지 끊임없이 일어났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
UN군 대표로 참석한 윌리엄 해리슨 중장과 북한군 대장 남일,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 3자가 휴전협정에 사인하며 3년 1개월간의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막을 내린다.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남한 국군은 휴전협정장에 배석하지 않았다.(또는 못했다.)

수많은 전투에 참가했었을 이미 제대(군대를 마침) 날짜는기약도 의미도 없어진
25세 청년은 ‘철의 삼각지’ 금화지구에서 전투에서 1952년 1월 19일 전투중 전사한다.
그의 유골과 군번줄은 타의에 의해 국토가 두동강 난 38도 휴전선이 그어진지
1
1년 10개월후인 1954년 10월 발견되어 부모와 가족에게 통보된다.
15살의 어린 남동생은 ‘운동화를 사주겠다’며 환하게 웃으며 떠났던
둘째 형이 영영 못돌아 온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25세 전사하신 청년이 나의 큰 아버님이시다.
15살의 어린 남동생은 그 후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월남전에 참전하고,
육군 장교(중령)가 되신다.
그 어린 남동생이 나의 아버님이시다.

내일(6월 6일)은 순국선열을 기리는 제68회 현충일이다.
오전 10시 정각에 추도 사이렌이
불과 74년전 군용트럭에 올라타던 그 날 청년들의 귀에 들렸던 것처럼 울릴 것이다.

2 years ago (edited) | [Y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