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4:4-7]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는 바울의 옥중서신중 하나입니다. 바울은 전도 여행의 끝에 복음전하는 일로 인하여 로마로 압송되고, 거기서 상당기간동안 가택연금상태로 순교의 날을 기다리게 됩니다. 옥중서신은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들에게 복음 안에서 위로와 목회적 조언을 전하는 뜨거운 편지이지요.
오늘 4장 말씀은 이 빌립보서에서도 가장 말미에 바울의 권면을 담은 결론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권면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기뻐하라” 그리고 “너희 관용을 알게 하라” 이것이 별개의 권면으로 보이지만, 사실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사용된 관용 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ἐπιεικής(에피에이케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합리적인 것을 넘어서는 어떤 포용과 여유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너그러움, 관용, 용납 등 다양한 단어로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이 단어를 풀어 설명하자면, 내가 합리적으로 판단하기에 옳고 그름, 그것에 따라 내 상황과 감정 등이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일종의 수용력(capacity)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기뻐할 상황이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감사할 상황이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보기에는 지금 이 상황에서 화내고 짜증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합리적인 정당성을 넘어서 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기쁨, 이것을 담아내는 수용성,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관용”이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의 권면은 이런 의미입니다.
여러분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강조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상황이 기뻐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혼란스럽고,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은 외부에서 공격해옵니다. 나 바울은 지금 감옥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압니다, 지금 여러분이 기뻐하실 상황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주 안에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관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상황과 환경을 초월한 수용성입니다. 합리적이라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관용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십시오!
왜 그렇게 해야합니까?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 때문입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하루 하루 가까워 갑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지금도 1분 1초 주님 앞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습니다. 이 관용은 우리가 하나님앞에 섰을 때에 비로서 완성될 성품입니다.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에게 완전히 회복될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그 날에 우리는 일희일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계획 속에 어떤 일도, 사건도 버려지지 않고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됨을 비로서 이해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관용 가운데서 항상 기뻐하는 복을 지금 여기에서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관용이 지금 여기에 기쁨으로 관통해 흐르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이 결코 쉬운일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지난주 여러분과 함께 나눈 말씀처럼 세상은 늘 우리를 향해서 “이래도 감사해?”라고 압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종말론적 성품인 관용으로 항상 기뻐하는 삶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구체적인 방법을 제안합니다. 그것이 바로 6절과 7절입니다.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를 올려드리되 감사함으로 구할 것을 아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구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위에서 말한 “관용”의 성품입니다. 나의 알량한 합리성으로 지금 내 현실을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건 이래서 돼, 저건 저래서 안돼, 그래서 나는 기뻐할 수 없어’ 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지난 시간에 함께 나눈 말씀처럼 “내가 이해할 수 없지만,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심임을 믿습니다, 결국에는 성도의 삶을 감사로 인도하실, 이 세상 무엇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바로 모든 지각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모든 지각 위에, 그것보다 더 뛰어나시다고 합니다. 내가 합리적으로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된다고 했던 그것보다, 하나님이 그 걱정과 염려를 압도하시는 평강으로 우리를 덮으시는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평강 안에서 “관용”, 바로 에피에이케스 할 수 있습니다. 내 현실을 넘어서, 하나님안에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감사로 받아들이고 기뻐할 수 있는 은혜, 기쁨이 내 삶에 회복되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킵니다. 계속해서 부정성으로 흐르던 나의 생각, 비관으로 흐르던 나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 주신 관용(에피에이케스)의 성품으로 내 모든 지각위에 뛰어나신 평강 가운데 위선과 가식이 아닌 진정한 기쁨의 회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감사로 여러분이 마땅이 구해야 할 이 관용의 마음을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마음에 풍랑이 일렁이고 폭풍우가 몰아칠 때 모든 지각 위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을 압도하실 것입니다. 계속해서 부정으로 흘러가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고 우리 삶에 진정한 기쁨을 회복시킬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이래도 감사해?] 라고 질문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래도 감사해~]라고 대답하고 또, 우리의 영혼을 향해 [그래도 감사해!]라고 외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고백 속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삶의 고백으로 우리의 삶을 함께 기쁨으로 채워가길 바랍니다.
*잠시 오늘의 말씀과 설교를 묵상하며 우리의 삶에 적용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열매맺도록 3개의 기도제목을 기록하고 기도합니다. 1. 2. 3.
*내일 부터 시작될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겨드리며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합시다!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
오아시스교회
[안성진 목사의 아버지가 소천하여 5일 주일 오프라인 예배 진행이 제한됩니다. 가정/개인 예배로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도록 짧은 설교문을 올려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각자 예배하는 가운데 깊은 은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찬양하며 하나님을 높입니다(주 내 아버지 - 아 하나님의 은혜로)
https://youtu.be/9ypxWDqUNL4?si=AWmrx...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래의 설교문을 육성으로 따라 읽습니다(또는 가족의 대표가 읽습니다)
제목 :그래도 감사해!
[빌4:4-7]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는 바울의 옥중서신중 하나입니다.
바울은 전도 여행의 끝에 복음전하는 일로 인하여 로마로 압송되고, 거기서 상당기간동안 가택연금상태로 순교의 날을 기다리게 됩니다. 옥중서신은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들에게 복음 안에서 위로와 목회적 조언을 전하는 뜨거운 편지이지요.
오늘 4장 말씀은 이 빌립보서에서도 가장 말미에 바울의 권면을 담은 결론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권면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기뻐하라” 그리고 “너희 관용을 알게 하라”
이것이 별개의 권면으로 보이지만, 사실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사용된 관용 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ἐπιεικής(에피에이케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합리적인 것을 넘어서는 어떤 포용과 여유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너그러움, 관용, 용납 등 다양한 단어로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이 단어를 풀어 설명하자면, 내가 합리적으로 판단하기에 옳고 그름, 그것에 따라 내 상황과 감정 등이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일종의 수용력(capacity)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기뻐할 상황이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감사할 상황이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보기에는 지금 이 상황에서 화내고 짜증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합리적인 정당성을 넘어서 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기쁨, 이것을 담아내는 수용성,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관용”이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의 권면은 이런 의미입니다.
여러분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강조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상황이 기뻐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혼란스럽고,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은 외부에서 공격해옵니다.
나 바울은 지금 감옥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압니다, 지금 여러분이 기뻐하실 상황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주 안에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관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상황과 환경을 초월한 수용성입니다.
합리적이라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관용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십시오!
왜 그렇게 해야합니까?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 때문입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하루 하루 가까워 갑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지금도 1분 1초 주님 앞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습니다.
이 관용은 우리가 하나님앞에 섰을 때에 비로서 완성될 성품입니다.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에게 완전히 회복될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그 날에 우리는 일희일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계획 속에 어떤 일도, 사건도 버려지지 않고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됨을 비로서 이해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관용 가운데서 항상 기뻐하는 복을 지금 여기에서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관용이 지금 여기에 기쁨으로 관통해 흐르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이 결코 쉬운일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지난주 여러분과 함께 나눈 말씀처럼 세상은 늘 우리를 향해서 “이래도 감사해?”라고 압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종말론적 성품인 관용으로 항상 기뻐하는 삶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구체적인 방법을 제안합니다. 그것이 바로 6절과 7절입니다.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를 올려드리되 감사함으로 구할 것을 아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구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위에서 말한 “관용”의 성품입니다.
나의 알량한 합리성으로 지금 내 현실을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건 이래서 돼, 저건 저래서 안돼, 그래서 나는 기뻐할 수 없어’ 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지난 시간에 함께 나눈 말씀처럼
“내가 이해할 수 없지만,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심임을 믿습니다,
결국에는 성도의 삶을 감사로 인도하실, 이 세상 무엇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바로 모든 지각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모든 지각 위에, 그것보다 더 뛰어나시다고 합니다.
내가 합리적으로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된다고 했던 그것보다, 하나님이 그 걱정과 염려를 압도하시는 평강으로 우리를 덮으시는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평강 안에서 “관용”, 바로 에피에이케스 할 수 있습니다.
내 현실을 넘어서, 하나님안에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감사로 받아들이고 기뻐할 수 있는 은혜, 기쁨이 내 삶에 회복되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킵니다.
계속해서 부정성으로 흐르던 나의 생각, 비관으로 흐르던 나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 주신 관용(에피에이케스)의 성품으로 내 모든 지각위에 뛰어나신 평강 가운데
위선과 가식이 아닌 진정한 기쁨의 회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감사로 여러분이 마땅이 구해야 할 이 관용의 마음을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마음에 풍랑이 일렁이고 폭풍우가 몰아칠 때
모든 지각 위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을 압도하실 것입니다.
계속해서 부정으로 흘러가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고
우리 삶에 진정한 기쁨을 회복시킬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이래도 감사해?] 라고 질문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래도 감사해~]라고 대답하고 또,
우리의 영혼을 향해 [그래도 감사해!]라고 외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고백 속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삶의 고백으로
우리의 삶을 함께 기쁨으로 채워가길 바랍니다.
*잠시 오늘의 말씀과 설교를 묵상하며 우리의 삶에 적용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열매맺도록 3개의 기도제목을 기록하고 기도합니다.
1.
2.
3.
*내일 부터 시작될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겨드리며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합시다!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
2 months ago | [YT]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