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외 해주는 신부

1.지난 월요일에 시작한 연중 사제피정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공허함이 아닌 고요함, 혀 끝에서 느껴지는 음식 본연의 맛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있는 식사, 지저귀는 새소리, 뺨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결. 이 모든 것이 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소소한 특권입니다. 피정에 함께한 어느 신부님이 '갑자기 아무것도 할 게 없으니 이상하다'며 웃으며 말씀하셨는데, 그 옆에 있던 신부님이 '아무것도 할게 없는게 피정이지요'라고 대답해서 모두가 웃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서 역설적으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던 광야의 시간이 곧 피정입니다.

2.올해 피정에서 제가 선택한 영성 서적은 40대 젊은 나이에 작고하신 스페인 출신 파블로 도밍게스 신부님의 유작 중 하나인 [주님의 기도로 피정하기]입니다(성바오로 출판사). 이 책은 “우리 신부님은 어떻게 피정할까?”라는 부제가 말해주는 것처럼, 사제들을 대상으로 했던 신부님의 피정 강의를 정리한 책입니다. 일반적인 피정 강의 책은 많이 있지만, 사제들을 대상으로 하는 피정 강의는 쉽게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누구보다 저에게 귀한 책이었습니다.

3.하지만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은 보편적 신앙의 정수인 [주님의 기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누구에게나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루에도 최소 5-6번은 바치는 기도이고, 사제로서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영적 독서였습니다.

4.그런데 왠걸. 이 책은 마치 졸고 있는 저를 냅다 후려친 죽비와도 같았습니다. 무더위와 장마 탓인지 점점 느슨해져가던 제 영적 태도를 완전히 다시 고쳐먹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바라고 청하는, 그리고 청해야하는 모든 내용들은 모두 주님의 기도 안에 다 들어있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이 책만큼 잘 설명하는 책은 개인적으로 아직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철학과 신학, 성경, 영성까지 자유롭게 드나들며 쉽게 이해되면서도 깊이 있는 설명과 함께, 신부님이 삶 속에서 직접 체험한 다양한 에피소드와 적절한 비유와 예화에 탄복하며 읽었습니다.

5.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신부님의 마음과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스페인과 남미 콜롬비아 등, 동료 사제들을 대상으로 피정을 지도하는 특별하고 귀한 달란트를 받으신 신부님답게, 분명 책을 읽는데도 마치 오디오가 지원되는 듯, 신부님의 목소리가 들리는듯 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정신이 번쩍 들어서 바오로 사도가 만약 지금 살아계시다면 우리들에게 이런 강론을 하시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챕터 하나하나가 귀해서 한 번에 다 읽기보다, 자주 조금씩 꼭꼭 씹어 묵상하며 밖에서도 반복해서 읽으며 계속 피정을 이어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6.무엇보다 파블로 신부님의 강의에 감화되어 저 역시 피정을 하며 회개의 마음이 마구 솟아났습니다. 저녁 8시 넘어 방에서 책을 읽다가 캄캄한 성당으로 뛰쳐나가 성체조배를 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강의는 단순한 지적인 만족감만 주지 않고 실제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기도하게 만들고, 다시 사랑할 용기와 힘을 주는 놀라운 힘을 가진 강의입니다.

7.동료 형제 신부님들께 진심으로 추천합니다. 그리고 사제나 수도자는 아니지만, 매일 바치는 주님의 기도에 담긴 이 풍성한 의미를 체계적으로 잘 이해하고 싶으신 분, 더 깊은 기도와 영성 생활에 목말라하시는 분, 따로 시간내어 멀리 피정하러 가기 어려우신 분, 다소 느슨하고 냉담해진 마음을 다시 불타오르게 만들고 싶으신 모든 분들께 이 책을 진심으로 추천합니다. 매번 피정때마다 꺼내서 읽고 싶은 이런 좋은 책을 번역해주신 광주대교구 강기남 요셉 신부님께도 깊은 감사드립니다.

4 months ago (edited) | [YT] | 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