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그리고 아내, 처제는 두 시간을 약속하고 남탕과 여탕으로 들어갔다. 관광지라 그런지 탕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일단 샤워했다. 미끌미끌 연수는 여러 번을 행군 끝에 비누 성분을 제거할 수 있었다. 이런 맛에 온천에 오는 것이 아닌가. 부드러운 물결 속에 푹 빠져버린 나는 온탕 냉탕을 거쳐서 하늘이 뻥 뚫린 노천탕에서 눈을 감고 즐겼다. 머리는 시원하고 아래는 따뜻하고 정말 좋았다. 그런데 누군가를 찾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두 번째 방송이 귀를 쫑긋하게 했다. 아뿔싸, 내 이름이 아닌가.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이제 겨우 입수하여 온천욕을 만끽하려는 순간인데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가슴이 쿵쾅쿵쾅 뛰고 머리털이 솟구쳤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탕을 나왔다. 처제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고 아내는 무엇에 놀란 것처럼 우왕좌왕 버벅거렸다.
지금은 온천여행을 즐기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코로나 영향이 큰 것 같다. 전국의 온천 관광지가 경영난에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은 곳이 즐비하다. 하지만 1998년도는 대 성황이었다. 서울에도 몇군데 있었다. 그중 노원구 하계동에 있는 ‘서울온천’을 자주 갔다. 하지만 서울 근교인 포천의 온천장이 인기가 좋았다. 특히 유황이 포함된 온천수는 피부질환에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여 주말에는 온천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주차장이 미어터졌다. 단체 관광차도 가득했다.
1998년 겨울 어느 날 아내와 함께 경기도 포천 이동에 있는 온천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곳은 셋째 처제가 살고 있다. 온천 겸 상큼하고 달콤한 공기를 마실 겸해서 집을 나서기로 한 것이다. 출고한 지 얼마 안 되는 내 생에 첫차 달구지를 자랑도 할 겸해서 말이다. 사실 겁도 났다. 초보라 시내만 왔다 갔다 했지, 장거리 운전은 해본 적이 없다. 용기를 내기로 했다. 아내 역시 산행보다 온천욕을 좋아해서 가자고 졸랐다.
일단 집을 나섰다. 가다가 운전하기 곤란하면 돌아오면 되는 것이다. 시내를 벗어나 국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급브레이크를 밟아 고개가 휘청했다. 그때마다 옆에 있는 아내는 화들짝 놀라곤 했다. “조심, 조심, 앞을 잘 보고 가세요” 아내는 가는 내내 잔소리에 잔소리를 끊임없이 이어갔다. 손에 땀이 흥건하게 고였다. 등줄기 역시 줄줄 흘렀다.
2월은 겨울철이다. 빙판길도 간간이 보였다. 산은 눈이 그대로다. 포천을 가기 위해서는 북쪽으로 한참을 가야 한다. 서울보다 추위가 매섭다.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개천으로 곤두박질쳐 생명을 앗아 갈 수도 있다. 개천을 따라가는 길은 편도 1차선으로 곡예 운전해야 한다. 우여곡절 끝에 물 좋고 공기 좋은 포천의 이동면 어느 산골 마을에 도착했다.
셋째 처제가 사는 집은 초가집이다. 하지만 실내는 궁전이다. 실내 장식을 고급스럽고 효율성 있게 꾸며놓았다. 마루를 개조한 거실에는 오디오가 있었고, 양쪽 소리통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웅장했다. 물맛 좋고 공기 좋은 언덕에 멋지게 꾸미고 사는 처제의 보금자리는 별장이며 휴양소와 다름이 없었다.
처제는 서울살이하다가 결혼과 동시에 포천으로 이사했다. 동서는 시골 옆 동네에 사는 이웃이나 다름없는 잘 아는 직업군인이다. 장인 장모도 서로 왕래하는 사이이기도 하다. 처제는 셋째딸로 5자매 중 가장 예쁘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서울로 상경하여 둘째 처제 집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둘째 처제는 비디오 가게를 운영했다. 그곳에서 일 도와 가며 지내다가 취업하여 본격적인 돈벌이에 뛰어들어 잘 적응하고 있었다.
시골에서 연락이 왔다. 선을 보라는 것이다. 처제는 아직 나이가 어려 결혼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는데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대 초반 사회생활도 이제 초년생인데 무슨 결혼이란 말인가. 그렇게 거부하였음에도 연락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여름 휴가철이 다가왔다. 처제는 유명 관광지로 피서를 갈까 하다가 부모님을 뵐 겸 해서 시골을 가게 되었다. 그 소식을 알게 된 동서 부모님은 군부대 아들에게 연락했다. 무조건 내려오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처제는 시골 도착과 동시에 끌려가다시피 하여 선을 보게 되었다. 만나는 순간 아! 어찌 이럴 수가. 옆 동네 오빠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더군다나 동서는 아내와 동창이기도 하다.
처제는 선을 보고 난 후 아무 생각 없이 상경했다. 동서는 둘째 처제와 기거하는 곳에 주말마다 나타나 구애하였다. 집을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신기했다. 아마도 시골에서 주소를 알아 온 것이 분명했다. 이미 양가 부모는 약정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주말마다 찾아오는 동서의 열정과 몇 번 만나보니 괜찮아 보였다. 반전이다. 결국 동서의 집요한 구애 끝에 산골 오지로 따라가고 말았다.
그렇게 경기도 포천 산골에 둥지를 틀고 동거를 시작했다. 지금은 포장이 잘 되어 1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그때 당시는 꼬불꼬불 외길을 가야 하는 관계로 두 시간은 잡아야 했다. 부모 곁을 떠나 서울 생활도 쉽지 않았는데 마트도 없는 오지에서의 삶은 불편하고 무섭기까지 했다. 가장 불편한 것은 재래식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이다. 낮에는 괜찮은데 밤에 혼자 가는 것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늘 동서가 대동하여 입구에서 보초를 서야 했다.
조카가 태어났다. 더 이상 결혼식을 미룰 수 없었다. 군에서 제공하는 식장에서 아주 저렴하게 식을 올릴 수 있었다. 세간살이는 이미 다 준비해놓아 결혼 비용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물 맑고 공기 좋은 포천 이동에서 첫 둥지를 틀고 새살림이 시작된 것이다.
‘이동’하면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동막걸리가 인기 좋다. 이동갈비 또한 명성이 자자하다. 길가마다 갈비식당이 즐비하다. 포천에 왔으니 이동막걸리도 마시고 갈비도 뜯어야 하지 않겠는가. 갈비 맛을 보기 위해 근처 식당으로 갔다. 식당 뒤편에 조성된 인공폭포는 영하의 날씨에 얼어붙어 장관을 이루었다. 식당 안은 갈비 맛을 보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주말이기도 한 탓에 빈자리가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빈자리가 보였다. 밑반찬이 깔리고 숯불이 나왔다. 열기가 후끈했다. 생갈비가 나왔다. 서비스 만점, 타지 않게 잘 구워 주었다. 오래간만에 맛보는 이동갈비는 고소하고 쫄깃함에 잠시 행복했다. 집으로 오는 길 반짝이는 별을 보며 시골 정취를 만끽했다.
집에 도착하여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시골이라 민원이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주로 군인이 사는 시골 동네에 젊은 분들이 많았다. 다음날 근무를 위해서는 깊은 잠을 자야 하는데 고성방가에 잠을 청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노래를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볼륨을 줄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수다를 떨다가 목이 마르면 시원한 맥주를 음료수로 대신했다.
취기가 있어 잘 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새우잠에 뒤척이다가 먼저 일어났다. 옆에 있는 아내를 깨웠다. 조금만 더 잔다고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부스럭거리면 민폐다. 어둠이 겉이기 시작했다. 다시 아내를 깨웠다.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처제도 깨웠다. 동서는 깊은 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온천 가는 것을 포기했다. 둘째를 임신하여 만삭인 처제는 부끄럽다며 거절했다. 온천에 가본 지 오래고 출산 전 온천욕은 태아에게 좋겠다고 설득하여 온천장에 갔다.
새벽인데도 주차장에 차량 들이 제법 많았다. 세면도구를 챙겼다. 남자들이야 아무것도 필요 없다. 면도기 하나면 족하다. 버린 것 주워 써도 문제없다. 하지만 위생상 그럴 순 없었다. 때 수건과 일회용 면도기를 사고 기쁜 마음으로 들어갔다. 잠시 샤워하고 온천욕을 즐기려는 순간 나를 찾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평소 두 시간 약속하고 들어가면 세 시간 넘어서 나오는 아내와 처제인데 이상했다. 대충 물기를 닦고 나와 보니 처제와 아내가 구세주를 만난 듯 반겼다. 빨리 의정부에 있는 병원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아기가 온천수에 놀랐는지 발길질을 심하게 하는 바람에 진통이 왔다는 것이다.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괜히 잘 자는 처제를 데리고 온 게 무리였나 보다. 집에 있는 동서에게 급히 연락하여 출산에 필요한 물건을 챙기라 했다. 처제는 진통을 이겨내느라 얕은 신음을 뱉어냈다. 일단 집으로 가서 동서를 태우고 의정부 병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은 험난했다. 진통은 더해 앓는 소리는 커지는데 달릴 수는 없고 눈앞이 캄캄했다. 더욱이 아기가 위치를 잘못 잡아 조만간 수술하기로 예약되어 있었다. 지체로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겠다는 불길한 생각에 머리가 쭈뼛 식은땀이 흘렀다. 정상 분만도 어려운데 거꾸로 있는 아기가 차 안에서 나온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아내는 속도를 내라 외쳤지만, 빙판길이면서 꼬불꼬불 산길에서 가속 페달을 밟을 수가 없었다. 가슴은 쿵쾅쿵쾅 폭포수가 된 땀은 등줄기를 적셨다.
한 시간 넘게 곡예 운전 끝에 병원에 도착했다. 응급실을 거쳐 산부인과로 올라갔다. “이제 오면 어떻게 합니까.” 의사 선생님은 호들갑을 떨며 나무랐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병원에 도착하는 순간 아기의 발이 자궁 밖으로 나와 있었다는 것이다. 보호자 서명과 동시에 마취하고 수술실에 들어갔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아내 그리고 동서는 안절부절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입이 바싹 마르면서 숨이 가빠 오고 가슴이 답답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간호사 선생님이 나왔다. “예쁜 딸을 순산했습니다” 이게 뭔 소린가. 마취해서 수술실로 들어갔는데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자궁 밖으로 나와 버린 발 때문에 수술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자연분만으로 순산했다는 것이다.
하늘이 도왔다. “만세! 만세! 만세!” 마음속으로 외치고 또 외졌다. 잠시 큰 한숨을 내쉬고 물 한 모금 마시고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동서와 아내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의 제안으로 온천욕을 하는 바람에 긴급 상황이 발생했다. 병원 가는 내내 머리는 복잡하게 돌아갔었다. 잘못되면 어쩌나. 원망은 나에게 쏟아질 것이 분명하다. 평생 죄책감에 살아야 한단 말인가. 간담이 서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이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기분전환 차 모처럼 온천여행이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수술하지 않고 순산하는 바람에 병원비를 절약할 수가 있었고, 그때 병원에 처제를 긴급 호송한 달구지는 큰 사고 없이 타다가 막내 처제에게 넘겨주었다. 짧은 순간 긴장의 연속인 가운데 태어난 조카 ‘유진’이는 노래도 잘하고 마음씨도 곱기가 비단결이다. 내년이면 대학을 졸업하고 건축설계 전문가로 거듭날 것이다. 비록 미완성 온천여행이었지만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다.
말까시TV
십년감수
나 그리고 아내, 처제는 두 시간을 약속하고 남탕과 여탕으로 들어갔다. 관광지라 그런지 탕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일단 샤워했다. 미끌미끌 연수는 여러 번을 행군 끝에 비누 성분을 제거할 수 있었다. 이런 맛에 온천에 오는 것이 아닌가. 부드러운 물결 속에 푹 빠져버린 나는 온탕 냉탕을 거쳐서 하늘이 뻥 뚫린 노천탕에서 눈을 감고 즐겼다. 머리는 시원하고 아래는 따뜻하고 정말 좋았다. 그런데 누군가를 찾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두 번째 방송이 귀를 쫑긋하게 했다. 아뿔싸, 내 이름이 아닌가.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이제 겨우 입수하여 온천욕을 만끽하려는 순간인데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가슴이 쿵쾅쿵쾅 뛰고 머리털이 솟구쳤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탕을 나왔다. 처제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고 아내는 무엇에 놀란 것처럼 우왕좌왕 버벅거렸다.
지금은 온천여행을 즐기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코로나 영향이 큰 것 같다. 전국의 온천 관광지가 경영난에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은 곳이 즐비하다. 하지만 1998년도는 대 성황이었다. 서울에도 몇군데 있었다. 그중 노원구 하계동에 있는 ‘서울온천’을 자주 갔다. 하지만 서울 근교인 포천의 온천장이 인기가 좋았다. 특히 유황이 포함된 온천수는 피부질환에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여 주말에는 온천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주차장이 미어터졌다. 단체 관광차도 가득했다.
1998년 겨울 어느 날 아내와 함께 경기도 포천 이동에 있는 온천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곳은 셋째 처제가 살고 있다. 온천 겸 상큼하고 달콤한 공기를 마실 겸해서 집을 나서기로 한 것이다. 출고한 지 얼마 안 되는 내 생에 첫차 달구지를 자랑도 할 겸해서 말이다. 사실 겁도 났다. 초보라 시내만 왔다 갔다 했지, 장거리 운전은 해본 적이 없다. 용기를 내기로 했다. 아내 역시 산행보다 온천욕을 좋아해서 가자고 졸랐다.
일단 집을 나섰다. 가다가 운전하기 곤란하면 돌아오면 되는 것이다. 시내를 벗어나 국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급브레이크를 밟아 고개가 휘청했다. 그때마다 옆에 있는 아내는 화들짝 놀라곤 했다. “조심, 조심, 앞을 잘 보고 가세요” 아내는 가는 내내 잔소리에 잔소리를 끊임없이 이어갔다. 손에 땀이 흥건하게 고였다. 등줄기 역시 줄줄 흘렀다.
2월은 겨울철이다. 빙판길도 간간이 보였다. 산은 눈이 그대로다. 포천을 가기 위해서는 북쪽으로 한참을 가야 한다. 서울보다 추위가 매섭다.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개천으로 곤두박질쳐 생명을 앗아 갈 수도 있다. 개천을 따라가는 길은 편도 1차선으로 곡예 운전해야 한다. 우여곡절 끝에 물 좋고 공기 좋은 포천의 이동면 어느 산골 마을에 도착했다.
셋째 처제가 사는 집은 초가집이다. 하지만 실내는 궁전이다. 실내 장식을 고급스럽고 효율성 있게 꾸며놓았다. 마루를 개조한 거실에는 오디오가 있었고, 양쪽 소리통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웅장했다. 물맛 좋고 공기 좋은 언덕에 멋지게 꾸미고 사는 처제의 보금자리는 별장이며 휴양소와 다름이 없었다.
처제는 서울살이하다가 결혼과 동시에 포천으로 이사했다. 동서는 시골 옆 동네에 사는 이웃이나 다름없는 잘 아는 직업군인이다. 장인 장모도 서로 왕래하는 사이이기도 하다. 처제는 셋째딸로 5자매 중 가장 예쁘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서울로 상경하여 둘째 처제 집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둘째 처제는 비디오 가게를 운영했다. 그곳에서 일 도와 가며 지내다가 취업하여 본격적인 돈벌이에 뛰어들어 잘 적응하고 있었다.
시골에서 연락이 왔다. 선을 보라는 것이다. 처제는 아직 나이가 어려 결혼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는데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대 초반 사회생활도 이제 초년생인데 무슨 결혼이란 말인가. 그렇게 거부하였음에도 연락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여름 휴가철이 다가왔다. 처제는 유명 관광지로 피서를 갈까 하다가 부모님을 뵐 겸 해서 시골을 가게 되었다. 그 소식을 알게 된 동서 부모님은 군부대 아들에게 연락했다. 무조건 내려오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처제는 시골 도착과 동시에 끌려가다시피 하여 선을 보게 되었다. 만나는 순간 아! 어찌 이럴 수가. 옆 동네 오빠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더군다나 동서는 아내와 동창이기도 하다.
처제는 선을 보고 난 후 아무 생각 없이 상경했다. 동서는 둘째 처제와 기거하는 곳에 주말마다 나타나 구애하였다. 집을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신기했다. 아마도 시골에서 주소를 알아 온 것이 분명했다. 이미 양가 부모는 약정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주말마다 찾아오는 동서의 열정과 몇 번 만나보니 괜찮아 보였다. 반전이다. 결국 동서의 집요한 구애 끝에 산골 오지로 따라가고 말았다.
그렇게 경기도 포천 산골에 둥지를 틀고 동거를 시작했다. 지금은 포장이 잘 되어 1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그때 당시는 꼬불꼬불 외길을 가야 하는 관계로 두 시간은 잡아야 했다. 부모 곁을 떠나 서울 생활도 쉽지 않았는데 마트도 없는 오지에서의 삶은 불편하고 무섭기까지 했다. 가장 불편한 것은 재래식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이다. 낮에는 괜찮은데 밤에 혼자 가는 것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늘 동서가 대동하여 입구에서 보초를 서야 했다.
조카가 태어났다. 더 이상 결혼식을 미룰 수 없었다. 군에서 제공하는 식장에서 아주 저렴하게 식을 올릴 수 있었다. 세간살이는 이미 다 준비해놓아 결혼 비용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물 맑고 공기 좋은 포천 이동에서 첫 둥지를 틀고 새살림이 시작된 것이다.
‘이동’하면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동막걸리가 인기 좋다. 이동갈비 또한 명성이 자자하다. 길가마다 갈비식당이 즐비하다. 포천에 왔으니 이동막걸리도 마시고 갈비도 뜯어야 하지 않겠는가. 갈비 맛을 보기 위해 근처 식당으로 갔다. 식당 뒤편에 조성된 인공폭포는 영하의 날씨에 얼어붙어 장관을 이루었다. 식당 안은 갈비 맛을 보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주말이기도 한 탓에 빈자리가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빈자리가 보였다. 밑반찬이 깔리고 숯불이 나왔다. 열기가 후끈했다. 생갈비가 나왔다. 서비스 만점, 타지 않게 잘 구워 주었다. 오래간만에 맛보는 이동갈비는 고소하고 쫄깃함에 잠시 행복했다. 집으로 오는 길 반짝이는 별을 보며 시골 정취를 만끽했다.
집에 도착하여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시골이라 민원이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주로 군인이 사는 시골 동네에 젊은 분들이 많았다. 다음날 근무를 위해서는 깊은 잠을 자야 하는데 고성방가에 잠을 청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노래를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볼륨을 줄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수다를 떨다가 목이 마르면 시원한 맥주를 음료수로 대신했다.
취기가 있어 잘 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새우잠에 뒤척이다가 먼저 일어났다. 옆에 있는 아내를 깨웠다. 조금만 더 잔다고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부스럭거리면 민폐다. 어둠이 겉이기 시작했다. 다시 아내를 깨웠다.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처제도 깨웠다. 동서는 깊은 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온천 가는 것을 포기했다. 둘째를 임신하여 만삭인 처제는 부끄럽다며 거절했다. 온천에 가본 지 오래고 출산 전 온천욕은 태아에게 좋겠다고 설득하여 온천장에 갔다.
새벽인데도 주차장에 차량 들이 제법 많았다. 세면도구를 챙겼다. 남자들이야 아무것도 필요 없다. 면도기 하나면 족하다. 버린 것 주워 써도 문제없다. 하지만 위생상 그럴 순 없었다. 때 수건과 일회용 면도기를 사고 기쁜 마음으로 들어갔다. 잠시 샤워하고 온천욕을 즐기려는 순간 나를 찾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평소 두 시간 약속하고 들어가면 세 시간 넘어서 나오는 아내와 처제인데 이상했다. 대충 물기를 닦고 나와 보니 처제와 아내가 구세주를 만난 듯 반겼다. 빨리 의정부에 있는 병원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아기가 온천수에 놀랐는지 발길질을 심하게 하는 바람에 진통이 왔다는 것이다.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괜히 잘 자는 처제를 데리고 온 게 무리였나 보다. 집에 있는 동서에게 급히 연락하여 출산에 필요한 물건을 챙기라 했다. 처제는 진통을 이겨내느라 얕은 신음을 뱉어냈다. 일단 집으로 가서 동서를 태우고 의정부 병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은 험난했다. 진통은 더해 앓는 소리는 커지는데 달릴 수는 없고 눈앞이 캄캄했다. 더욱이 아기가 위치를 잘못 잡아 조만간 수술하기로 예약되어 있었다. 지체로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겠다는 불길한 생각에 머리가 쭈뼛 식은땀이 흘렀다. 정상 분만도 어려운데 거꾸로 있는 아기가 차 안에서 나온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아내는 속도를 내라 외쳤지만, 빙판길이면서 꼬불꼬불 산길에서 가속 페달을 밟을 수가 없었다. 가슴은 쿵쾅쿵쾅 폭포수가 된 땀은 등줄기를 적셨다.
한 시간 넘게 곡예 운전 끝에 병원에 도착했다. 응급실을 거쳐 산부인과로 올라갔다. “이제 오면 어떻게 합니까.” 의사 선생님은 호들갑을 떨며 나무랐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병원에 도착하는 순간 아기의 발이 자궁 밖으로 나와 있었다는 것이다. 보호자 서명과 동시에 마취하고 수술실에 들어갔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아내 그리고 동서는 안절부절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입이 바싹 마르면서 숨이 가빠 오고 가슴이 답답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간호사 선생님이 나왔다. “예쁜 딸을 순산했습니다” 이게 뭔 소린가. 마취해서 수술실로 들어갔는데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자궁 밖으로 나와 버린 발 때문에 수술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자연분만으로 순산했다는 것이다.
하늘이 도왔다. “만세! 만세! 만세!” 마음속으로 외치고 또 외졌다. 잠시 큰 한숨을 내쉬고 물 한 모금 마시고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동서와 아내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의 제안으로 온천욕을 하는 바람에 긴급 상황이 발생했다. 병원 가는 내내 머리는 복잡하게 돌아갔었다. 잘못되면 어쩌나. 원망은 나에게 쏟아질 것이 분명하다. 평생 죄책감에 살아야 한단 말인가. 간담이 서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이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기분전환 차 모처럼 온천여행이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수술하지 않고 순산하는 바람에 병원비를 절약할 수가 있었고, 그때 병원에 처제를 긴급 호송한 달구지는 큰 사고 없이 타다가 막내 처제에게 넘겨주었다. 짧은 순간 긴장의 연속인 가운데 태어난 조카 ‘유진’이는 노래도 잘하고 마음씨도 곱기가 비단결이다. 내년이면 대학을 졸업하고 건축설계 전문가로 거듭날 것이다. 비록 미완성 온천여행이었지만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다.
1 year ago (edited) | [Y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