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산책

# 비움

산책 중, 내가 당신을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한참을 그 앞에 머물렀다. 가시에 둘러싸인 밤송이가 스스로 벌어져 속의 윤기 나는 열매들을 세상에 내어놓고 있었다. 텅 빈 껍질만 남은 채로 말이다. 산길 흙바닥에 굴러다니는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숭고해 보였을까.

진정한 성취란 무엇인가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내어주는 것임을. 밤나무는 일 년 내내 햇빛과 비와 바람을 받아 정성껏 기른 열매를 아무런 조건 없이 땅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 순간, 나무는 비로소 자신의 존재 이유를 완성한다. 백석산의 고즈넉한 산길에서 만난 이 작은 생명체가 내게 전하는 메시지였다.

밤송이를 보며 문득, 너무 오랫동안 채우는 것에만 몰두해 왔다는 것을. 더 많은 지식, 더 많은 경험, 더 많은 사랑을 얻으려고 애써왔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언제, 어떻게 내어놓을 것인가였다. 꽉 쥔 주먹 안에는 새로운 것이 들어올 수 없다. 가득 찬 컵에는 더 이상 부을 것이 없다.

비움은 포기가 아니다. 비움은 용기다. 자신이 간직해온 소중한 것들을 세상과 나누는 용기, 완벽하지 않은 모습 그대로 타인 앞에 서는 용기, 실패할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시도하는 용기다. 밤송이가 가시를 세우며 열매를 보호하다가도 결국 자신을 열어젖히듯, 우리도 때로는 방어막을 내리고 진정한 자신을 드러낼 용기가 필요하다.

가장 풍요로운 사람은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다. 가장 강한 사람은 모든 것을 견뎌내는 사람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당신은 모든 것을 비우시는군요, 새로운 것을 담겠지요, 저를 담으시면 됩니다.” 서로의 빈 공간에~

조금씩 비워간다. 고집스러운 편견들을, 의미 없는 소유욕들을, 남들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들을. 그리고 그 빈 자리에 새로운 경험들이, 새로운 사람들이, 새로운 가능성들이 들어온다.

비우는 것은 잃는 것이 아니었다. 비우는 것은 시작하는 것이었다.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었다. 사진 속 그 작은 열매가 가르쳐준, 삶의 가장 큰 지혜였다.

1 week ago (edited) | [Y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