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대로 말씀과 기도의 집

테슈바 40일 경외 <39>
존 비비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압도적인 경외감에 사로잡힐 때 비로소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할 수 있다. (알리스테어 벡)
(34) 하나님께 신뢰를 받다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친구”로 불린 구약의 다른 인물을 살펴보자.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출애굽기 33장 11절)

성경에서 하나님과 모세의 우정에 대해 “대면하여”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거의 이해하기 힘들 정도다. 생각해 보라. 이분은 길거리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심지어 유명한 인물도 아니다. 이분은 무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이제 이 표현이 얼마나 엄청난지 이해가 가는가? 친밀함을 묘사하는 이 표현은 성경에서 한 번만 사용되고 있지는 않다. 이 표현은 하나님이 모세를 비판하는 아론과 미리암에게 분노하셨을 때 두 번째로 사용된다. 하나님은 지엄한 음성으로 이렇게 선언하셨다.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내가 신뢰하는 사람이다.)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민수기 12장 7~8절)

하나님께 “내가 너를 신뢰한다.” 라는 말을 듣는 것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 중 하나다. 여기서 하나님과의 우정에 관한 또 다른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우정은 신뢰라는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신뢰를 어떻게 쌓을 수 있을까?

○무조건적인 순종: 항상 시키는 대로 하는 것
○절대적인 언행일치: 항상 말한 대로 지키는 것
○흔들리지 않는 우선 순위: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최우선시 하는 것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 결정을 내릴 때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

이 네 가지 모든 측면에서 일관성을 갖추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다. 어느 한 영역이 무너지면 재빨리 진심으로 회개해야 한다. 그러면 신뢰 회복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 거룩한 두려움은 이 네 가지 영역 모두에서 신뢰성을 갖추게 만든다. 이번 장에서는 세 번째와 네 번째 영역, 즉 항상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선택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모세의 삶을 생각해 보라. 처음 40년간은 막대한 부와 각종 산해진미, 화려한 옷과 최고의 물질로 가득한 삶이었다. 으리으리한 집에서 살았던 그는 뭐든 원하는 대로 즐길 수 있었다. 온 천지에 그의 할아버지인 바로보다 더 부유하거나 강력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애굽의 보화를 갖는 것 대신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통을 선택했다. 그가 그분의 큰 보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장 25~26절)

모세는 그 모든 안락에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그는 왕궁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애굽에서 얻을 수 없는 “그분의 큰 보상”을 “선택”했다. 그 상은 약속의 땅 가나안이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그가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가장 열렬히 추구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그가 왕궁을 나간 뒤의 삶을 살펴보자. 그가 왕궁의 모든 부귀영화를 떠나기로 한 선택이 현명해 보이는가? 삶의 환경이 애굽 왕자 시절보다 좋아졌는가? 그가 사람들을 다스리는 일을 버리고 한 일은 광야에서 기껏 양이나 치는 것이었다. 그것도 무려 40년 동안이나! 정말 긴 시간이다. 그다음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바로에게서 해방 시키는, 매우 골치 아프고도 지지부진한 시간을 지나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황량한 광야에서 장막(텐트)를 치며 살았다. 그가 이끄는 사람들은 툭하면 그의 리더십에 불만을 떠뜨리고 말썽을 일으켰다.

이런 상황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스트레스와 피곤을 크게 덜어 줄 제안을 하신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사람들을 모아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라고 지시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인도하여 모든 적국을 몰아낼 천사를 엄선해 배정하신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곳이 매우 풍요롭고 비옥한 땅이라는 점을 상기시키신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이렇게 선언하신다.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출33:3)

잠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같이 마주한 현실을 떠올려 보자. 광야는 다채로울 게 전혀 없다. 아름다운 골짜기나 강, 숲, 비옥한 땅, 정원, 수목원, 초장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따뜻한 목욕을 하고 푹신한 침대에서 자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느긋하게 쇼핑을 한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났다. 지긋지긋한 메뉴에 신선한 과일이나 채소, 생선, 소고기, 디저트는 구경한 지 오래였다. 매일 아침 땅 위에 놓여 있는 만나가 끼니의 전부였다. 땅콩버터나 잼을 바르거나 소시지를 끼워 넣은 빵이 아니었다.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을 끔찍했지만 메마른 사막에서 방황하는 생활은 그보다 나을 게 없었다. 어떤 식으로 힘드냐만 달라졌지 극도로 힘들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광야에서는 소망이 있었다. 풍요롭고 비옥하고 아름다운 땅을 얻으리라는 소망, 그들은 그 땅을 위해 수 세대를 기다렸다!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을 듣는 순간이 그려지는가? 나 같으면 당장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가 온 백성에게 이 놀라운 소식을 전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기뻐하며 그를 다시 위대한 리더로 치켜세웠을 것이다. 모든 백성이 그토록 기대했던 약속의 땅으로 힘차게 한 걸음을 내딛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제안에 대한 모세의 반응을 들어 보라.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출애굽기 33장 15절)

“이곳”은 어디인가? 바로 역경과 스트레스와 고난이 점철된 광야다. 모세는 깨닫지 못한 자들에게는 당혹스럽고 심지어 황당무계하게 들리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는 사실상 이렇게 선언했다. “하나님의 ‘임재’와 ‘복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조건 하나님의 임재를 선택하겠습니다!” 왜일까? 누군가와 함께 있지 않고도 그에 관해서 알 수 있지만 그와 친밀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모세가 간절히 원했던 보상이다.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모세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기를 거부하는데 하나님은 왜 기뻐하시는가?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다. 이렇게 생각해 보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혼자서만 즐길 수 있는 뭔가를 제시한다고 해 보자. 사심 없이 제시했는데 그가 뜻밖에도 이렇게 말한다. “됐어요 저는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아요. 당신이 없으면 세상 부귀영화가 다 무슨 소용인가요?” 이런 반응이 물론 드물긴 하지만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 반응인가?

모세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하나님께 중요한 것이 항상 최우선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기에 그분의 신뢰를 얻었다. 하지만 그가 이끈 사람들은 다른 마음을 품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하나님)는 모세에게 그의 속성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의 행사를 보이셨다. (시편 103편 7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러신 것처럼 모세에게도 그분의 “속성”을 밝히셨다. GNT 역본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분의 “계획”을 밝히셨다고 번역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그분의 비밀을 모세에게 밝히셨다. 단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밝히지 않으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기도응답 곧 그분의 “행사”를 통해서만 그분을 알았다.

오늘날 기도 응답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아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친밀한 관계보다는 거래 관계에 더 가깝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알지만 그분의 마음은 모른다. 그들에게 성경은 주로 규칙과 역사 이야기처럼 보일 뿐이다. 혹은 교훈을 얻기 위한 자료로만 사용될 뿐이다. 심지어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는 인생 변화의 진리들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들의 불법적인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하기까지 한다.

아브라함과 롯과 다를 바 없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의로웠다.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만이 그분의 마음(그분의 속성, 비밀, 계획)을 알 수 있다. 왜 하나님은 모세는 신뢰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신뢰하지 않으셨을까? 하나님은 모세가 언제나 모세 자신에게 좋아 보이는 것보다 그분의 마음을 선택할 줄 아셨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거룩한 두려움을 지니고 사는 삶이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자 하나님은 진노 가운데 이렇게 선언하셨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애굽기 32장 10절)

이번에도 구미가 당길 만한 제안이 등장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큰 나라를 이루겠다고 말씀하신다. 이 얼마나 멋진 제안인가. 하지만 모세의 반응은 또 어떠했는가? 이번에도 그는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좋은 쪽을 선택했다. 그는 애굽을 비롯한 지켜보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평판을 생각해서 이 제안을 거두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뢰를 저버린 분으로 부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뜻을 돌이키”시라며 대담하게 간구했다. (12절) 그에게는 진노한 하나님께 마음을 바꾸시라고 요청드릴 만한 베짱이 있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그분의 마음과 뜻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라면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이 모세를 신뢰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해 주시면서도 신뢰하지는 않으신 이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강한 마수에서 기적적으로 건져 주셨지만 그들에게 마음을 터놓지는 않으셨다. 우정에 대한 이런 조건이 신약 시대를 사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그대로 적용될까? 다음 장에서는 이 문제를 살펴보자.

핵심 말씀 :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맡기고 넘겨주셨으니)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11:27)

1 week ago | [Y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