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하여 쌓여 있는 카톡을 읽는다. 수 많은 청년들의 삶의 정황과 문제가 카톡을 통해 공유된다. 감히 내가 해결해 줄 수도, 어찌할 수도 없는 거대한 장벽들이다.
순간 죽음의 세력이 나의 마음속을 침범한다. 나는 곧 무기력해진다. 청년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는 절망감에 에너지를 빼앗긴다. 과거의 경험들도 떠오른다. 과거에 있었던 좋지 못한 일들이 여전히 반복되리라 믿고 있다. 내면 깊을곳으로부터 스스로에게 속삭이는 음성이 들린다.
"이번에도 결과가 좋지 않을거야."
내면의 목소리와 싸운다.
오늘 하루 내가 넘어야 할 산들도 생각난다. 해내지 못할 것만 같다. 오늘 하루를 바라보는 내 시야에도 죽음의 영향력이 넘실된다. 내적 싸움이다. 아니, 영적 싸움이라고 해야할까? 오늘 하루와 싸워보지도 않았는데 이미 패배했다.
외적 갈등에 지속적으로 열정을 소모하며 점차 무기력해진다. 아뿔싸, 무기력의 패턴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2.
그렇게 혼자 씨름하고 있던 도중,
갑자기 "큐티하자"는 아내의 명령(?)에 로마서 본문을 살펴보니 충격적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8)
바울의 선언이 곧 내 마음에 한줄기 빛으로 다가오며 곧 두려움이 걷힌다.
죽음의 세력은 나의 삶속에 생존본능을 주입한다. 예수님의 방식이 아닌 본능을 따라 생존하도록 만든다.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
는 생존본능이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었다. 내 힘으로, 내가 이겨내고, 나는 생존한다. 세속에서는 합리적인 방식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성경적인 방식은 아니다. 에수께서 걸어가셨던 골고다의 언덕길은 더더욱 아니다.
예수께서는 죽음 앞에 순종할 것을 선택하셨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기로 결정하셨다. 그것은 낮아짐의 신비였다.
예수께서는 빌라도의 법정 앞에서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의 배신에도 놀라지 않으셨다. 그분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셨다. 그분의 발걸음은 언덕 위에 놓인 사형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수 많은 군병들이 채찍을 휘둘렀을 때에도, 넘어져 일어날 힘이 없을 때에도,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지었을 때에도. 반항하거나 변명하지 않으셨다. 그저 죽음을 온몸으로 받아내셨다.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운명하셨다. 세속에서 죽음은 패배를 의미한다. 생존이 미덕이다. 죽음은 끝을 의미한다. 모두가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분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그분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생존에 대한 본능으로 죽음을 이기는 세상적 방식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이라는 통로를 통해 부활한 육체를 입음으로 죽음의 세력을 이기는 최후 승리를 보여주셨다.
3.
나는 본능적으로 '삶의 생존 욕구'를 따랐다. 생존은 세속적인 방식이지 예수님의 방식은 아니다. 나는 세속에 너무 물들어있기에 너무나 쉽게 그 삶의 방식을 받아들인다.
때문에 성령의 충만함을 구할 수 밖에 없다. 성령께서 나를 인도해주시지 않으면 "예수께서 나의 주인이다." 라는 고백이 나오지 않을 것이며, 예수께서 걸어가셨던 죽음이라는 통로를 건널 용기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오늘 하루를 결단한다.
나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내가 나 스스로를 죽이는 자의적 죽음이 아니다. 예수께서 이미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 내 자아가 이미 십자가에 못박혔음을 믿는다.
나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내가 나 스스로의 정욕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가 예수와 십자가에 못박혔음을 상기하고 기억하므로 그분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다.
4.
오늘 하루 내가 겁내왔던 모든 일상을 향해 선언한다.
"나는 예수와 함께 죽었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두려움들에 대해 생존하려는 마음을 버린다.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간인지라 완전히 두려움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결국 내가 해내야 하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령께서 상기시켜 주시길 바란다.
오늘은 정말 해야할 일들이 많다. 모두 생명을 걸어야할 만큼 중대한 일들이다. 그 일들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기를, 그리고 내가 죽는 과정이 되길. 마지막으로 외친다.
종리스찬TV
"죽음은 이미 그 주도권을 상실했고,
두려움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
1.
우리는 죽음속을 거닐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하여 쌓여 있는 카톡을 읽는다. 수 많은 청년들의 삶의 정황과 문제가 카톡을 통해 공유된다. 감히 내가 해결해 줄 수도, 어찌할 수도 없는 거대한 장벽들이다.
순간 죽음의 세력이 나의 마음속을 침범한다. 나는 곧 무기력해진다. 청년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는 절망감에 에너지를 빼앗긴다. 과거의 경험들도 떠오른다. 과거에 있었던 좋지 못한 일들이 여전히 반복되리라 믿고 있다. 내면 깊을곳으로부터 스스로에게 속삭이는 음성이 들린다.
"이번에도 결과가 좋지 않을거야."
내면의 목소리와 싸운다.
오늘 하루 내가 넘어야 할 산들도 생각난다. 해내지 못할 것만 같다. 오늘 하루를 바라보는 내 시야에도 죽음의 영향력이 넘실된다. 내적 싸움이다. 아니, 영적 싸움이라고 해야할까? 오늘 하루와 싸워보지도 않았는데 이미 패배했다.
외적 갈등에 지속적으로 열정을 소모하며 점차 무기력해진다. 아뿔싸, 무기력의 패턴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2.
그렇게 혼자 씨름하고 있던 도중,
갑자기 "큐티하자"는 아내의 명령(?)에 로마서 본문을 살펴보니 충격적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8)
바울의 선언이 곧 내 마음에 한줄기 빛으로 다가오며 곧 두려움이 걷힌다.
죽음의 세력은 나의 삶속에 생존본능을 주입한다. 예수님의 방식이 아닌 본능을 따라 생존하도록 만든다.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
는 생존본능이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었다. 내 힘으로, 내가 이겨내고, 나는 생존한다. 세속에서는 합리적인 방식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성경적인 방식은 아니다. 에수께서 걸어가셨던 골고다의 언덕길은 더더욱 아니다.
예수께서는 죽음 앞에 순종할 것을 선택하셨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기로 결정하셨다. 그것은 낮아짐의 신비였다.
예수께서는 빌라도의 법정 앞에서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의 배신에도 놀라지 않으셨다. 그분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셨다. 그분의 발걸음은 언덕 위에 놓인 사형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수 많은 군병들이 채찍을 휘둘렀을 때에도, 넘어져 일어날 힘이 없을 때에도,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지었을 때에도. 반항하거나 변명하지 않으셨다. 그저 죽음을 온몸으로 받아내셨다.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운명하셨다. 세속에서 죽음은 패배를 의미한다. 생존이 미덕이다. 죽음은 끝을 의미한다. 모두가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분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그분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생존에 대한 본능으로 죽음을 이기는 세상적 방식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이라는 통로를 통해 부활한 육체를 입음으로 죽음의 세력을 이기는 최후 승리를 보여주셨다.
3.
나는 본능적으로 '삶의 생존 욕구'를 따랐다. 생존은 세속적인 방식이지 예수님의 방식은 아니다. 나는 세속에 너무 물들어있기에 너무나 쉽게 그 삶의 방식을 받아들인다.
때문에 성령의 충만함을 구할 수 밖에 없다. 성령께서 나를 인도해주시지 않으면 "예수께서 나의 주인이다." 라는 고백이 나오지 않을 것이며, 예수께서 걸어가셨던 죽음이라는 통로를 건널 용기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오늘 하루를 결단한다.
나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내가 나 스스로를 죽이는 자의적 죽음이 아니다. 예수께서 이미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 내 자아가 이미 십자가에 못박혔음을 믿는다.
나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내가 나 스스로의 정욕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가 예수와 십자가에 못박혔음을 상기하고 기억하므로 그분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다.
4.
오늘 하루 내가 겁내왔던 모든 일상을 향해 선언한다.
"나는 예수와 함께 죽었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두려움들에 대해 생존하려는 마음을 버린다.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간인지라 완전히 두려움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결국 내가 해내야 하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령께서 상기시켜 주시길 바란다.
오늘은 정말 해야할 일들이 많다. 모두 생명을 걸어야할 만큼 중대한 일들이다. 그 일들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기를, 그리고 내가 죽는 과정이 되길. 마지막으로 외친다.
"죽음은 이미 그 주도권을 상실했다."
1 month ago | [YT] | 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