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강연

향수 – 정지용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은 노인이
함께 타는 화롯불에 손을 얹고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강변에 겨울눈 녹으면
미루나무 가지에 슬픈 눈이 어린다
텃논에 머슴아이 호미자루 끌며
아침 짓는 부엌에 고요한 바람이
젖은 손을 불에 쪼이며
새악시 치마 자락 소리 바삐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같이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
따라 울며 걸어가던 어린아이
같이 늙어 바랑을 매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이가
있는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4 weeks ago | [Y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