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맞이하는 이 하루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 이유를 묻지 않고 흘려보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작용과 순환, 그리고 거대한 질서 속에서 오늘도 우리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1. 변함없이 작동하는 천지의 섭리
천지의 자연 섭리에서 단 하나라도 어긋난다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를 인식하든 못하든, 자연은 쉼 없이 움직입니다. 해가 뜨고, 바람이 불고, 공기가 우리 주변을 채우는 일. 삶에 불편함이 없도록 작동하는 이 모든 것들이, 실은 자연 에너지의 거대한 순환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그러나 너무 당연하게 느껴져 우리는 종종 그 가치를 잊고 살아갑니다.
2. 인간과 환경의 작용·반작용
우리는 이러한 자연의 흐름 속에서 매일 환경과 사람을 만나 부딪히며, 작용과 반작용을 만들어냅니다. 이 원리를 알고 살아가는 것과 모르고 살아가는 것은 당장은 큰 차이가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앎’의 유무는 삶의 결과에서 확연한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씨앗을 심지 않았는데 줄기가 돋고 열매가 맺히길 바랄 수는 없습니다. 하루하루가 저절로 흘러가는 듯 보여도,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에너지의 순환은 결국 양이 찬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각자의 길로 이끌어 갑니다. 사건, 사고, 환경, 사회 변화—모두가 이 법칙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3. 상호작용 속의 중심, 인간
자연이 에너지를 보내고 흡수하듯, 금리가 오르고 내리듯, 숨을 들이쉬고 내쉬듯, 모든 것은 상호작용 속에서 조화를 이룹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바로 인간이 있습니다. 이 중심이 무너지면 사회와 환경도 변합니다.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말입니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천지 기운은 가만히 계시사, 인이 동한다”는 가르침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 깊이를 다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뜻이 뼛속 깊이 와닿습니다. 천지는 그 자리에 있지만, 인간의 움직임이 곧 세상과 역사를 만든다는 사실 말입니다.
오늘 하루, 이 자연의 거대한 섭리 속에서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 깨달음을 마음에 담을 때, 매일의 삶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기적의 연속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요? 저는 최근 ‘의식의 확장’이라는 개념을 깊이 사유하며, 인간 존재의 근본 목적과 그 여정의 의미를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정의 궁극적인 결론은 바로 ‘인간 사람’이 되어가는 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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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 사람’의 첫걸음 – 나를 세우는 70% 질량
진정한 ‘인간 사람’이 되는 여정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단단히 세우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저는 이를 ‘질량이 70%까지 차오르는 시점’이라 표현합니다. 이는 단순히 의식주가 안정된 상태를 넘어, 내면과 삶의 기반이 충분히 다져져서 유연성과 여유가 생기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시기에는 오직 자신을 돌보고 힘을 비축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아직 그릇이 충분히 커지지 않았는데 무리해서 나누려 하면, 나도 무너지고 상대도 부담을 질 수 있습니다. 진정한 나눔은 내가 채워진 후에야 가능합니다. 그때 비로소 더 큰 것을 품고 나눌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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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의식 확장 – 나에서 인류로
질량이 채워졌다면, 이제 에너지를 사적인 쓰임에서 공적인 쓰임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이때 시작되는 것이 바로 의식 확장입니다.
의식의 확장은 ‘나와 가족’에서 ‘이웃’, ‘사회’, ‘나라’, 나아가 ‘인류’ 전체를 포용하는 시야를 갖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점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내 앞의 사람을 올바르게 대하는 삶입니다. 거창한 계획보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진심과 배려, 슬기로운 소통을 실천하는 것이 의식 확장의 첫 발걸음입니다.
이 단계에 들어서면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사적인 욕구에 머물던 시선이 넓어지고, ‘성장의 길’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그 길이 보이면, 우리는 보이는 대로 가면 됩니다. 그 길은 결국 세상을 품고, 나아가 우주까지 품을 수 있는 길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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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연의 순리 – 쓰임의 법칙
여기에는 분명한 자연의 법칙이 작용합니다. 만약 개인이 질량을 채우고도 사적인 욕망에 머물러 능력과 자원을 공적으로 쓰지 않는다면, 자연의 에너지는 그 불균형을 바로잡으려 개입합니다.
이 과정은 때로 사기, 사건·사고, 병과 같은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는 벌이 아니라, 정체된 에너지를 흔들어 올바른 쓰임으로 흐르게 하는 자연의 작용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불균형과 그 조정 과정을 관찰하면, 자연의 순리가 얼마나 엄격하게 작동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거대한 지구, 행성, 그리고 우주 전체에서 동일하게 작동합니다. 이를 깨달으면, 우리는 오십 대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이르러 하늘과 땅의 이치를 보고, 남은 생을 세상과 나누는 지혜로 살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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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홍익인간과 공도사상 – 궁극적인 삶의 길
결국 이 모든 여정은 **홍익인간(널리 인간을 이롭게 함)**과 **공도사상(공공의 이익을 위한 길)**으로 귀결됩니다. 자신을 세우고, 내 앞의 사람을 올바르게 대하며, 오늘 하루의 환경에서 슬기롭게 살아가고, 나아가 자신의 자원을 공적으로 쓰는 삶—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이 오랜 세월 지켜온 삶의 정신입니다.
인간의 삶은 개인적 성장을 넘어, 의식을 확장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세상을 위해 쓰며, 궁극적으로 우주의 에너지 순환에 동참하는 과정입니다. 이 지구의 에너지는 우리가 진정한 ‘인간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개인의 풍요로움을 넘어선 의식 확장을 통해, 우리 모두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지혜로운 삶, 홍익인간의 삶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광활한 우주 속에서 행성들은 각기 다른 질량을 가지고 자신만의 궤도를 따라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만약 이 행성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게 된다면, 그 파장은 상상할 수 없는 대재앙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는 비단 천체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 사회, 그리고 우리 개개인의 삶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는 깊은 통찰을 최근 나누게 되었습니다.
1. 에너지의 충돌과 순환: 삶이라는 궤도
우리는 매일같이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며 관계 속에서 '에너지'를 주고받습니다. 때로는 충돌하며 새로운 파동을 만들어내고, 때로는 부딪힘을 통해 오래된 에너지를 비워내고 또 다른 에너지를 채워 넣으며 살아갑니다. 이 과정은 마치 태양계 행성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균형을 이루듯이, 우리 삶의 궤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근원적인 힘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보이는 물리적인 에너지만이 우리 삶을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기쁨, 슬픔, 사랑, 지식, 경험, 가치관 등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인 에너지'**야말로 우리 삶의 방향과 관계의 질을 운영하는 진정한 동력입니다. 보이는 현실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보이지 않는 '질량'이라는 의미입니다.
2. 영혼의 양식: 내면의 질량을 키우다
그렇다면 이 보이지 않는 비물질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일 얻는 **'일용할 양식(養識)', '지식(知識)', 그리고 '인성교육(人性敎育)'**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육신이 음식으로 에너지를 보충하듯이, 우리 내면의 '영혼', 즉 '진정한 나'는 바로 이 비물질적인 '일용할 양식'을 통해 기운을 얻고 살아가는 **'질량'**을 키워나갑니다. 여기서 양식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마음을 살찌우는 모든 경험, 깨달음, 그리고 정신적인 성숙을 의미합니다. 올바른 지식은 세상을 바르게 보고 판단하는 힘을 주며, 겸손과 배려를 아우르는 인성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조화로운 에너지를 만들어냅니다.
3. 질량의 부족과 삶의 부침
만약 이 영혼의 '질량'이 부족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마치 에너지가 부족해 동력을 잃은 기계처럼, 우리 삶에서도 어려움과 정체 현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내면의 에너지가 고갈되면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거나 난관을 극복할 힘이 부족해지고, 결국 삶은 정체되거나 오히려 뒤로 퇴보하는 경험을 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는 개인의 성장과 발전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장애물이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영혼의 질량이 충분하고 단단하다면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나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위기는 성장의 기회가 되고, 좌절은 더 큰 도약의 발판이 됩니다.
4. 삶의 에너지는 자연의 섭리
이 모든 과정은 자연 속 에너지의 순환과 참으로 닮아 있습니다. 물이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땅으로 돌아오듯이, 우리도 삶의 에너지를 끊임없이 비우고 채우는 과정을 반복하며 성장합니다. 내면의 비물질 에너지를 어떻게 채우고 관리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궤도는 더욱 단단하고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 삶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은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영혼의 질량'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꾸준히 내면의 양식과 지식을 쌓고, 올바른 인성을 길러가는 것이야말로 삶이라는 위대한 여정을 순조롭게 항해하고, 진정으로 의미 있는 인연을 만들어가는 길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만의 아름다운 질량을 가지고 삶의 궤도를 힘차게 나아가기를 응원합니다.
잘하는 것과 그냥하는 것은?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자신이 잘하는 것과 그냥 하는 것들이 있다. 지신이 잘하는 것은 무엇보다 잘할 수가 있을 것이고 잘하지 못하는 것은 평균 이하의 일이 될 수가 있다. 그냥 평범한 일도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잘 분별을 하자 우리는 다 잘할 수가 없고 그럴 수도 없게 되어있는 것이 우리 인간들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 할 일이 있고 그 일속에서 자신이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사회가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이렇게 서로 다른 인간들이 사회를 만들어 가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보인다. 잘 하려면은 자신의 맞는 일을 찾아서 그 일을 충분히 노력을 하면은 자신의 그 일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할 수가 있다. 그 일이 자신의 일이 된다고 보면은 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자신의 맞는 일을 하는 것보다. 다양함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기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 노력이라는 것을 한다. 그것도 열심히 하면은 어떻게 될까? 하기실은 일을 하거나 그 길이 아닌 일을 열심히 하면은 안된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병들어 가는 것이라고 보면은 된다.
자신의 적성의 맞고 잘 하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어떻게 삶이 재미없고 무료할 수가 있을까? 살아가는 내내 재밌고 즐거움만 있을 뿐이지. 나의 재능과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좋아하는 일과 보기 좋은 일을 하려다 보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가야 하니까 지신이 늘 일에 재미도 없고 일이 즐겁지도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자신이 할 일을 찾아 하는 내가 되도록 노력을 해보자 그러면 삶이 재미와 즐거움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입니다.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삶을 시작하는 첫걸음입니다. 인간은 모두 각기 다른 재능과 기운을 가지고 태어나며, 그 다름이야말로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불필요한 괴로움을 만들어냅니다. 자신을 모르고 외부의 기준에 얽매여 살아갈 때, 진정한 자유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란, 나를 알고 나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자유는 아무 제약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내 삶의 한계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충실히 행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알게 되면, 더 이상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어지고, 내 길을 나답게 걸어갈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은 단순히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삶에 적용되어야 진정한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면, 그 깨달음을 내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실천하는 과정에서 그 깨달음은 우리 삶에 흡수되고 소화되며, 마침내 우리의 습관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올바른 습관은 나를 바꾸고, 나의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중요한 힘이 됩니다.
습관은 우리가 반복적으로 행하는 행동이 쌓여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좋은 습관은 우리가 어려움을 헤쳐나가고, 삶의 가치를 높이는 데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점검하고, 나쁜 습관을 버리고 좋은 습관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은 쉽지 않을 수 있지만, 꾸준히 실천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긍정적으로 변화합니다.
결국,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길은 자신을 아는 데서 시작하여, 깨달음을 실천하고, 올바른 습관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자신만의 고유한 길을 걸어가며, 인간다운 삶을 완성할 수 있게 됩니다. 나 자신을 이해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며,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삶의 모습이 아닐까요?
삶은 매일의 선택과 행동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제는 세상의 주인으로서, 나 자신을 알고, 내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삶을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얻고, 나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과 사회를 밝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 사회를 이해하고 자연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우리의 존재가 개별적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를 단계별로 살펴보며, "모두가 하나"라는 통찰의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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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계: 우리 몸과 사회의 닮은꼴
우리 몸은 수많은 세포와 장기, 혈액, 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구성 요소는 저마다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도, 몸이라는 전체를 유지합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 집단, 기관 등 각 구성원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어 나갑니다. 핵심 교훈: 각자의 역할이 다르지만, 우리는 하나의 시스템 속에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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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단계: 자동차와 사회의 작동 원리
자동차를 이루는 부품들은 모두 다르지만, 각각의 기능이 맞물려 자동차를 움직입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독립적이지만 상호 의존적인 관계 속에서 사회를 움직입니다. 핵심 교훈: 조화와 균형이 사회를 작동시키는 원동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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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계: 지구와 사회의 확장된 연결
이 원리를 더 크게 확장하면, 지구 전체가 하나의 생명체처럼 작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와 대륙, 자연 생태계는 모두 독립적이지만 상호 의존적입니다. 오대양과 육대주가 서로 다른 역할을 하면서 지구라는 행성 안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핵심 교훈: 사회는 지구의 일부이며, 우리 모두는 이 거대한 유기체의 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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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단계: 모두가 하나라는 깨달음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큰 틀에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개인의 역할과 다름을 인정하고, 조화 속에서 상호 협력할 때 "모두가 하나"라는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핵심 교훈: 사회를 이해하는 것은 곧 조화와 연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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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단계: 이해의 척도가 바꾸는 시각
사회와 자연을 이해하는 척도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다름 속에서 더 큰 그림을 보게 됩니다. 이를 통해 갈등보다는 협력을, 분열보다는 통합을 선택하게 됩니다. 핵심 교훈: 사회와 자연을 하나로 보는 시각은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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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단계: 실천으로 이어지는 깨달음
"모두가 하나"라는 통찰은 단순히 깨달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타인의 역할을 존중하고,
공동체적 협력과 연대를 실천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핵심 교훈: 깨달음은 실천을 통해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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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모두가 하나, 함께 살아가는 길
사회와 자연, 그리고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된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입니다. 이를 깨닫고 실천할 때, 우리는 개인을 넘어 공동체, 지구 전체를 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작은 깨달음에서 시작된 변화가 세상을 밝히는 큰 빛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깨달음을 실천하고 있나요? 각자의 자리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요? 함께 생각을 나누어 보세요!
우리는 매일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틀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잘생겼다/못생겼다", "부자/가난한 자", "맞다/틀리다"와 같은 단순한 대립 구조는 우리의 사고를 한정하고 세상을 단순화한다. 하지만 이런 흑백 논리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왜 우리는 복잡한 세상을 이렇게 단순화하려는 걸까?
이분법적 사고는 우리의 본능적인 사고방식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으로 학습된 결과다. 산업화 시대를 떠올려보자. 효율성과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간과 자원을 규격화해야 했던 시대였다. 사회는 대량 생산과 소비를 위해 사람들을 "필요하다/필요하지 않다", "좋다/나쁘다"로 분류했다. 교육 시스템 또한 여기에 맞춰 단순하고 명확한 정답과 오답의 틀을 만들어냈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는 복잡한 문제를 이분법적으로 단순화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다. 단순화된 사고는 복잡한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사회적 불평등은 경제적 요인, 역사적 맥락, 정책적 실패 등 다양한 요소가 얽혀 있는 복합적인 문제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부자는 이기적이다", "가난한 사람은 노력이 부족하다"와 같은 단순한 결론을 내린다. 이런 사고방식은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고, 갈등과 오해를 증폭시킨다.
이분법적 사고는 개인의 정체성과 다양성도 억압한다. 예를 들어, "잘생긴 사람이 성공한다"는 고정관념은 외모라는 단일한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게 만든다. 이는 개인의 고유한 재능과 가치를 무시하고, 특정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낙오자로 몰아가는 결과를 초래한다. 다양성이 존중되지 않는 사회는 혁신과 창의성을 잃고, 정체된 사고에 갇히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우선, 세상을 복합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길러야 한다. 모든 현상은 다양한 요인이 얽혀 상호작용하며 발생한다. 문제를 단순히 흑과 백으로 나누기보다는 그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관점과 맥락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개인적인 삶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제 해결에서도 중요한 접근법이다.
또한, 교육과 문화에서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강조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정답을 주입하기보다는 질문하고 탐구하는 방식을 가르쳐야 한다. 예를 들어, "이것이 맞다"고 가르치기보다 "왜 이것이 맞을까?" 또는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상호작용과 협력을 통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갈등은 다른 의견을 배척할 때 발생한다. 그러나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에서 배울 점을 찾는다면, 갈등은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너는 틀렸어"라고 말하기보다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야?"라고 질문하는 태도를 가져보자. 이는 서로를 이해하는 첫걸음이 된다.
결론적으로, 이분법적 사고는 우리 사회의 역사적 산물이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복잡한 세상에서는 단순한 흑백 논리를 넘어서, 다양한 관점과 맥락을 고려하는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잘생겼다/못생겼다, 부자/가난한 자와 같은 단순한 대립을 넘어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로 나아갈 때, 우리는 개인과 사회 모두의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옳다/그르다"를 넘어 "다르다"를 받아들이는 사회는 진정한 발전과 조화의 기반을 다질 수 있다.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규격화된 사고방식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이분법적 사고는 편리함을 제공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억압한 다양성과 가능성은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다. 현대 사회는 점점 더 복잡하고 상호의존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경제, 기술, 환경,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차원적이고 통합적인 사고가 요구된다.
새로운 사고방식은 단지 사회적 변화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삶에서도 우리는 더 풍요로운 관계와 경험을 위해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 자신과 타인을 단순히 "좋다/나쁘다"로 판단하기보다는, 서로의 고유함과 맥락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 깊은 인간관계를 맺고, 진정한 자기 성장의 길을 찾을 수 있다.
결국,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려는 노력은 개인과 사회 모두에게 도전이자 기회다. 우리는 서로 다른 생각과 관점을 존중하며, 다름에서 배우고 협력함으로써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 다차원적인 사고와 다양성의 존중은 우리를 더 큰 가능성과 조화로 이끌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단순하다. "이것이 옳은가?"라는 질문에서 "이것이 다를 수 있는가?"로 사고를 확장해보는 것이다. 이 질문이야말로 개인과 사회를 새로운 시대로 이끄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모두들 찾 열심히들 산다. 우리 사회에 보면은 참 열심히들 산다. 모두가 열심히 살아가는 것을 보면은 내가 무엇을 도와주고 싶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려주고 어떻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어떠한 이유로 해서 일어난 다는 것을 알면을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없이 즐거움만 있을 것 같은데 이를 전해줄 수가 없다. 이는 내가 해보니 우리 사회의 모든 것들을 이해를 하는 것에서 시작을 한다는 것에 있다.
이는 어느 한 종목에서 이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이해가 되어야 그 스토리가 연결이 되면서 우리 사회 전반이 이해가 되면서 전체의 그림이 그려진다. 이를 알려준다고 해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코끼리를 한 번도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아무리 코끼리를 설명을 해서 어떻게 코끼리를 이해를 할까? 알 수가 없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일들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 사회가 이렇게 잘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어린 친구들이 너무나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은 정말 이쁘고 사랑스럽고 멋지게 보인다. 이런 친구들이 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시장을 이해를 하면은 정말 좋은 것 같은데 이게 그렇게 쉽게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나도 어렸을 때에 어떻게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몰라서 정말 미친 듯이 일만 했는데 일과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지만 젊었을 때 애야 하는 공부는 따로 있는 것 같다.
그 공부가 끝나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이해가 가면서 삶을 주인공으로 보람과 의미가 있는 인생을 만들면서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런 게 이것을 이해를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다양한 공부가 되어야 하는데 이를 모르면 지금 광화문과 다양한 광장 정치로 나를 끌려다니면서 나의 인생의 진검 다리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이 우리 사회와 인성교육이 다 된 사람은 남은 인생은 여여한 인생 신선 같은 삶이 만들어지는 자신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와 환경이 다 나를 위해서 움직이는데 내가 그 움직임을 쓰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있을 뿐이다. 사회와 환경들은 다 자신들의 할 일을 하고 있는데 우리 인간들만 그것을 모르고 어리석은 시간을 보매고 있는 것이 너무나 웃푸다.
우리는 자주 자책에 빠진다. 내가 부족해서, 내가 잘못해서, 내가 더 노력하지 않아서… 하지만 정말 그럴까? 자책이라는 것이 단순히 나 자신을 향한 공격일까? 아니면 세상을 향한 불만과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부메랑처럼 나에게 되돌아오는 아픔일까? 나는 자책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아닌 남과 세상을 미워하는 데서 비롯된 고통이었다.
세상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정상이다. 만약 내 마음대로만 되는 세상이 있다면, 그 세상은 욕심으로 뒤엉켜 삐걱거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이미 조상들의 지혜와 자연의 섭리로 잘 균형 잡혀 있다. 내가 모르는 것, 닿지 못하는 것을 탓하거나 미워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을 이해한 만큼만 활용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여유롭고 조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미움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사랑을 몰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찾고 헤맨다. 사랑을 받으려고 애쓰고, 사랑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한다. 하지만 사랑은 받으려 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내가 먼저 줄 때, 그 사랑이 상대 안에서 씨앗처럼 자라나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내 안에 사랑이 없다면,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진정한 사랑을 받을 수 없다. 사랑은 내가 주는 만큼 흘러가고, 흘러간 만큼 나에게 돌아온다.
남을 미워할 때, 우리는 그 미움의 고통을 스스로 짊어진다. 미움은 상대를 해치기보다 나를 병들게 한다. 마찬가지로, 사랑을 주지 못할 때, 우리는 그 빈자리를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남을 미워하지 않아야 한다. 그 이유는 단지 도덕적 가르침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받아들여야 할 첫 번째 진실은, 세상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 진실을 인정하면 우리는 더 이상 세상과 싸우지 않게 된다. 대신, 세상과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해는 자유를 준다. 이해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벽처럼 느껴지지만, 이해하면 그 벽이 문으로 변한다.
자연은 한 번도 나를 배신한 적이 없다. 세상도 마찬가지다. 내가 미움과 불평불만으로 스스로를 망가뜨리지 않는다면, 세상은 그 자체로 나를 살리고, 나를 이롭게 한다. 내가 사랑을 줄 때, 사랑은 나를 통해 세상에 흘러가고,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 그러니 나는 내 마음에 묻는다. “내 안에 사랑이 있는가? 내가 사랑을 주고 있는가?” 그리고 이 질문의 답을 찾을 때,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사랑은 내가 흘려보낼 때 비로소 나에게 오는 것이다.
세이치 해탈
매일의 기적과 자연의 섭리 속에서 – 진정한 감사의 의미
우리는 매일 맞이하는 이 하루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 이유를 묻지 않고 흘려보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작용과 순환, 그리고 거대한 질서 속에서 오늘도 우리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1. 변함없이 작동하는 천지의 섭리
천지의 자연 섭리에서 단 하나라도 어긋난다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를 인식하든 못하든, 자연은 쉼 없이 움직입니다.
해가 뜨고, 바람이 불고, 공기가 우리 주변을 채우는 일.
삶에 불편함이 없도록 작동하는 이 모든 것들이, 실은 자연 에너지의 거대한 순환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그러나 너무 당연하게 느껴져 우리는 종종 그 가치를 잊고 살아갑니다.
2. 인간과 환경의 작용·반작용
우리는 이러한 자연의 흐름 속에서 매일 환경과 사람을 만나 부딪히며, 작용과 반작용을 만들어냅니다. 이 원리를 알고 살아가는 것과 모르고 살아가는 것은 당장은 큰 차이가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앎’의 유무는 삶의 결과에서 확연한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씨앗을 심지 않았는데 줄기가 돋고 열매가 맺히길 바랄 수는 없습니다. 하루하루가 저절로 흘러가는 듯 보여도,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에너지의 순환은 결국 양이 찬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각자의 길로 이끌어 갑니다. 사건, 사고, 환경, 사회 변화—모두가 이 법칙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3. 상호작용 속의 중심, 인간
자연이 에너지를 보내고 흡수하듯, 금리가 오르고 내리듯, 숨을 들이쉬고 내쉬듯, 모든 것은 상호작용 속에서 조화를 이룹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바로 인간이 있습니다.
이 중심이 무너지면 사회와 환경도 변합니다.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말입니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천지 기운은 가만히 계시사, 인이 동한다”는 가르침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 깊이를 다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뜻이 뼛속 깊이 와닿습니다. 천지는 그 자리에 있지만, 인간의 움직임이 곧 세상과 역사를 만든다는 사실 말입니다.
오늘 하루, 이 자연의 거대한 섭리 속에서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 깨달음을 마음에 담을 때, 매일의 삶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기적의 연속임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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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치 해탈
의식의 확장, 자연의 순리, 그리고 ‘인간 사람’이 되는 길
홍익인간과 공도사상에서 찾은 삶의 방향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요?
저는 최근 ‘의식의 확장’이라는 개념을 깊이 사유하며, 인간 존재의 근본 목적과 그 여정의 의미를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정의 궁극적인 결론은 바로 ‘인간 사람’이 되어가는 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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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 사람’의 첫걸음 – 나를 세우는 70% 질량
진정한 ‘인간 사람’이 되는 여정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단단히 세우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저는 이를 ‘질량이 70%까지 차오르는 시점’이라 표현합니다.
이는 단순히 의식주가 안정된 상태를 넘어, 내면과 삶의 기반이 충분히 다져져서 유연성과 여유가 생기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시기에는 오직 자신을 돌보고 힘을 비축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아직 그릇이 충분히 커지지 않았는데 무리해서 나누려 하면, 나도 무너지고 상대도 부담을 질 수 있습니다.
진정한 나눔은 내가 채워진 후에야 가능합니다. 그때 비로소 더 큰 것을 품고 나눌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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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의식 확장 – 나에서 인류로
질량이 채워졌다면, 이제 에너지를 사적인 쓰임에서 공적인 쓰임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이때 시작되는 것이 바로 의식 확장입니다.
의식의 확장은 ‘나와 가족’에서 ‘이웃’, ‘사회’, ‘나라’, 나아가 ‘인류’ 전체를 포용하는 시야를 갖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점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내 앞의 사람을 올바르게 대하는 삶입니다.
거창한 계획보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진심과 배려, 슬기로운 소통을 실천하는 것이 의식 확장의 첫 발걸음입니다.
이 단계에 들어서면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사적인 욕구에 머물던 시선이 넓어지고, ‘성장의 길’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그 길이 보이면, 우리는 보이는 대로 가면 됩니다.
그 길은 결국 세상을 품고, 나아가 우주까지 품을 수 있는 길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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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연의 순리 – 쓰임의 법칙
여기에는 분명한 자연의 법칙이 작용합니다.
만약 개인이 질량을 채우고도 사적인 욕망에 머물러 능력과 자원을 공적으로 쓰지 않는다면, 자연의 에너지는 그 불균형을 바로잡으려 개입합니다.
이 과정은 때로 사기, 사건·사고, 병과 같은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는 벌이 아니라, 정체된 에너지를 흔들어 올바른 쓰임으로 흐르게 하는 자연의 작용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불균형과 그 조정 과정을 관찰하면, 자연의 순리가 얼마나 엄격하게 작동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거대한 지구, 행성, 그리고 우주 전체에서 동일하게 작동합니다.
이를 깨달으면, 우리는 오십 대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이르러 하늘과 땅의 이치를 보고, 남은 생을 세상과 나누는 지혜로 살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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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홍익인간과 공도사상 – 궁극적인 삶의 길
결국 이 모든 여정은 **홍익인간(널리 인간을 이롭게 함)**과 **공도사상(공공의 이익을 위한 길)**으로 귀결됩니다.
자신을 세우고, 내 앞의 사람을 올바르게 대하며, 오늘 하루의 환경에서 슬기롭게 살아가고, 나아가 자신의 자원을 공적으로 쓰는 삶—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이 오랜 세월 지켜온 삶의 정신입니다.
인간의 삶은 개인적 성장을 넘어, 의식을 확장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세상을 위해 쓰며, 궁극적으로 우주의 에너지 순환에 동참하는 과정입니다.
이 지구의 에너지는 우리가 진정한 ‘인간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개인의 풍요로움을 넘어선 의식 확장을 통해, 우리 모두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지혜로운 삶, 홍익인간의 삶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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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치 해탈
보이지 않는 질량의 비밀: 삶의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가?
광활한 우주 속에서 행성들은 각기 다른 질량을 가지고 자신만의 궤도를 따라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만약 이 행성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게 된다면, 그 파장은 상상할 수 없는 대재앙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는 비단 천체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 사회, 그리고 우리 개개인의 삶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는 깊은 통찰을 최근 나누게 되었습니다.
1. 에너지의 충돌과 순환: 삶이라는 궤도
우리는 매일같이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며 관계 속에서 '에너지'를 주고받습니다. 때로는 충돌하며 새로운 파동을 만들어내고, 때로는 부딪힘을 통해 오래된 에너지를 비워내고 또 다른 에너지를 채워 넣으며 살아갑니다. 이 과정은 마치 태양계 행성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균형을 이루듯이, 우리 삶의 궤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근원적인 힘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보이는 물리적인 에너지만이 우리 삶을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기쁨, 슬픔, 사랑, 지식, 경험, 가치관 등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인 에너지'**야말로 우리 삶의 방향과 관계의 질을 운영하는 진정한 동력입니다. 보이는 현실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보이지 않는 '질량'이라는 의미입니다.
2. 영혼의 양식: 내면의 질량을 키우다
그렇다면 이 보이지 않는 비물질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일 얻는 **'일용할 양식(養識)', '지식(知識)', 그리고 '인성교육(人性敎育)'**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육신이 음식으로 에너지를 보충하듯이, 우리 내면의 '영혼', 즉 '진정한 나'는 바로 이 비물질적인 '일용할 양식'을 통해 기운을 얻고 살아가는 **'질량'**을 키워나갑니다. 여기서 양식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마음을 살찌우는 모든 경험, 깨달음, 그리고 정신적인 성숙을 의미합니다. 올바른 지식은 세상을 바르게 보고 판단하는 힘을 주며, 겸손과 배려를 아우르는 인성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조화로운 에너지를 만들어냅니다.
3. 질량의 부족과 삶의 부침
만약 이 영혼의 '질량'이 부족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마치 에너지가 부족해 동력을 잃은 기계처럼, 우리 삶에서도 어려움과 정체 현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내면의 에너지가 고갈되면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거나 난관을 극복할 힘이 부족해지고, 결국 삶은 정체되거나 오히려 뒤로 퇴보하는 경험을 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는 개인의 성장과 발전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장애물이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영혼의 질량이 충분하고 단단하다면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나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위기는 성장의 기회가 되고, 좌절은 더 큰 도약의 발판이 됩니다.
4. 삶의 에너지는 자연의 섭리
이 모든 과정은 자연 속 에너지의 순환과 참으로 닮아 있습니다. 물이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땅으로 돌아오듯이, 우리도 삶의 에너지를 끊임없이 비우고 채우는 과정을 반복하며 성장합니다. 내면의 비물질 에너지를 어떻게 채우고 관리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궤도는 더욱 단단하고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 삶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은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영혼의 질량'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꾸준히 내면의 양식과 지식을 쌓고, 올바른 인성을 길러가는 것이야말로 삶이라는 위대한 여정을 순조롭게 항해하고, 진정으로 의미 있는 인연을 만들어가는 길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만의 아름다운 질량을 가지고 삶의 궤도를 힘차게 나아가기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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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치 해탈
🌕 나이를 먹는다는 것 – 완전체를 향해가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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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를 먹는다는 건 단순히 늙는 것이 아니다.
육신은 늙어가지만, 영혼은 맑아져간다.
그리고 그 맑음은 결국 완전체로 이끄는 힘이 된다.”
이 글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평생을 걸쳐 얻고자 하는 **‘완전체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사유의 여정이다.
그것은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실제의 삶 속에서 먹고, 마시고, 부딪히며 살아내야 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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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를 먹는다는 것 – 늙음이 아니라 완성됨이다
세상은 ‘나이를 먹는다’는 말을 흔히 쇠퇴의 시작처럼 말한다.
주름이 늘고, 기력이 줄고,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일 수 있다.
> “우리는 나이를 먹으며 완전체를 향해가는 존재다.”
젊은 시절은 날것이다.
욕망은 거칠고, 감정은 뜨겁고, 비교는 깊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감정의 진폭을 조절하고,
타인의 시선보다 나 자신의 중심을 세우게 되며,
삶의 파도에 휘둘리기보다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눈을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완전체로의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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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 주는 일용할 양식
삶은 매일 우리에게 양식을 준다.
그것은 밥과 반찬의 형태만이 아니다.
✔️ 어떤 날은 한 마디 말로,
✔️ 어떤 날은 작은 갈등으로,
✔️ 때로는 실패나 외면, 기다림의 시간으로,
우리는 매일 일용할 영혼의 양식을 받고 있다.
그 양식을 잘 받아먹는 자만이,
내면의 질량을 키워나갈 수 있다.
> “이용할 양식을 먹지 않는데,
어떻게 질량이 찰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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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식하는 자는 완전체를 얻지 못한다
문제는 우리가 편식한다는 데 있다.
✔️ 좋은 말만 듣고 싶어 하고,
✔️ 고통은 회피하고,
✔️ 실패는 수치로 여기며,
✔️ 인연을 가리고,
✔️ 감정의 쓰라림은 외면한다.
이런 편식은 영혼의 성장을 막는다.
삶은 온전한 밥상을 차려주었지만,
우리는 입에 맞는 것만 골라먹으며
자신의 영혼을 가난하게 만든다.
> “편식하는 사람은 온전체를 얻을 수 없다.”
온전체란,
빛과 어둠,
기쁨과 고통,
성공과 상실을 모두 자신 안에 수용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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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관계, 가장 정교한 일용할 양식
가장 중요한 양식은 인간관계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 배우고,
사람을 통해 성장하고,
사람을 통해 스스로를 알게 된다.
> “인간은 지식의 총합을 품은 존재다.”
각자 다른 사람 속엔
내가 모르는 관점, 경험, 정보, 감정이 들어 있다.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나는
나를 흔들고, 비추고, 다시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인간관계를 회피한다.
상처받기 싫어서, 불편함을 피해서.
하지만 진짜 성장은 그 불편함을 통과한 자만이 얻는 것이다.
관계는 거울이다.
모든 사람은 나를 비추는 수련의 재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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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영혼의 파동이 세상을 바꾼다
이렇게 삶의 양식을 골고루 받아먹고,
인간관계를 양식으로 소화한 사람은
결국 맑은 영혼으로 정제된다.
그들은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아도
✔️ 존재만으로 분위기를 바꾸고,
✔️ 조용히 사람의 마음을 열며,
✔️ 갈등을 부드럽게 흘려보낸다.
> “맑은 영혼은 말 없이 이끈다.”
물리학의 ‘공명’처럼,
그들의 파동은 주변을 함께 진동시킨다.
그건 소리 없는 울림이고,
말 없는 지도력이다.
이런 사람들이 사회 곳곳에 있다면,
그 사회는 자연스럽게
균형과 평화를 회복해간다.
---
🌕 완전체의 삶이란…
완전체는 어떤 이상형이 아니다.
✔️ 모든 것을 소화한 사람,
✔️ 편식하지 않고 살아낸 사람,
✔️ 영혼의 질량을 키운 사람,
✔️ 그리고 그 맑은 에너지로 세상에 기여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따로 무엇을 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이웃에게 방향을 주고,
사회에 온기를 남기며,
다음 세대에게 길이 되는 사람이다.
---
🔚 마무리 – 나 하나의 맑음이 세상을 바꾼다
우리는 매일 선택할 수 있다.
> 오늘 하루의 양식을
편식할 것인가,
감사히 먹을 것인가?
나 하나가 맑아지는 것,
그것은 절대 작은 일이 아니다.
그 맑음은 파동이 되어,
곧 세상 전체를 움직이는 진동이 되기 때문이다.
---
📘 이 글은 하나의 길잡이입니다.
당신의 삶이 완전체로 향하는 길 위에 있기를,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당신만의 맑은 빛이 세상을 비추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3 months ago | [YT]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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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치 해탈
잘하는 것과 그냥하는 것은?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자신이 잘하는 것과 그냥 하는 것들이 있다. 지신이 잘하는 것은 무엇보다 잘할 수가 있을 것이고 잘하지 못하는 것은 평균 이하의 일이 될 수가 있다. 그냥 평범한 일도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잘 분별을 하자 우리는 다 잘할 수가 없고 그럴 수도 없게 되어있는 것이 우리 인간들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 할 일이 있고 그 일속에서 자신이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사회가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이렇게 서로 다른 인간들이 사회를 만들어 가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보인다. 잘 하려면은 자신의 맞는 일을 찾아서 그 일을 충분히 노력을 하면은 자신의 그 일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할 수가 있다. 그 일이 자신의 일이 된다고 보면은 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자신의 맞는 일을 하는 것보다. 다양함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기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 노력이라는 것을 한다. 그것도 열심히 하면은 어떻게 될까? 하기실은 일을 하거나 그 길이 아닌 일을 열심히 하면은 안된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병들어 가는 것이라고 보면은 된다.
자신의 적성의 맞고 잘 하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어떻게 삶이 재미없고 무료할 수가 있을까? 살아가는 내내 재밌고 즐거움만 있을 뿐이지. 나의 재능과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좋아하는 일과 보기 좋은 일을 하려다 보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가야 하니까 지신이 늘 일에 재미도 없고 일이 즐겁지도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자신이 할 일을 찾아 하는 내가 되도록 노력을 해보자 그러면 삶이 재미와 즐거움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이 든다.
8 months ago | [YT]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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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치 해탈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길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입니다.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삶을 시작하는 첫걸음입니다. 인간은 모두 각기 다른 재능과 기운을 가지고 태어나며, 그 다름이야말로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불필요한 괴로움을 만들어냅니다. 자신을 모르고 외부의 기준에 얽매여 살아갈 때, 진정한 자유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란, 나를 알고 나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자유는 아무 제약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내 삶의 한계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충실히 행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알게 되면, 더 이상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어지고, 내 길을 나답게 걸어갈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은 단순히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삶에 적용되어야 진정한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면, 그 깨달음을 내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실천하는 과정에서 그 깨달음은 우리 삶에 흡수되고 소화되며, 마침내 우리의 습관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올바른 습관은 나를 바꾸고, 나의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중요한 힘이 됩니다.
습관은 우리가 반복적으로 행하는 행동이 쌓여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좋은 습관은 우리가 어려움을 헤쳐나가고, 삶의 가치를 높이는 데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점검하고, 나쁜 습관을 버리고 좋은 습관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은 쉽지 않을 수 있지만, 꾸준히 실천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긍정적으로 변화합니다.
결국,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길은 자신을 아는 데서 시작하여, 깨달음을 실천하고, 올바른 습관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자신만의 고유한 길을 걸어가며, 인간다운 삶을 완성할 수 있게 됩니다. 나 자신을 이해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며,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삶의 모습이 아닐까요?
삶은 매일의 선택과 행동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제는 세상의 주인으로서, 나 자신을 알고, 내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삶을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얻고, 나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과 사회를 밝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8 months ago | [YT]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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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치 해탈
우리는 모두 하나: 사회와 자연의 유기적 연결
현대 사회를 이해하고 자연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우리의 존재가 개별적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를 단계별로 살펴보며, "모두가 하나"라는 통찰의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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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계: 우리 몸과 사회의 닮은꼴
우리 몸은 수많은 세포와 장기, 혈액, 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구성 요소는 저마다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도, 몸이라는 전체를 유지합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 집단, 기관 등 각 구성원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어 나갑니다.
핵심 교훈: 각자의 역할이 다르지만, 우리는 하나의 시스템 속에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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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단계: 자동차와 사회의 작동 원리
자동차를 이루는 부품들은 모두 다르지만, 각각의 기능이 맞물려 자동차를 움직입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독립적이지만 상호 의존적인 관계 속에서 사회를 움직입니다.
핵심 교훈: 조화와 균형이 사회를 작동시키는 원동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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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계: 지구와 사회의 확장된 연결
이 원리를 더 크게 확장하면, 지구 전체가 하나의 생명체처럼 작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와 대륙, 자연 생태계는 모두 독립적이지만 상호 의존적입니다. 오대양과 육대주가 서로 다른 역할을 하면서 지구라는 행성 안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핵심 교훈: 사회는 지구의 일부이며, 우리 모두는 이 거대한 유기체의 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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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단계: 모두가 하나라는 깨달음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큰 틀에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개인의 역할과 다름을 인정하고, 조화 속에서 상호 협력할 때 "모두가 하나"라는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핵심 교훈: 사회를 이해하는 것은 곧 조화와 연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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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단계: 이해의 척도가 바꾸는 시각
사회와 자연을 이해하는 척도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다름 속에서 더 큰 그림을 보게 됩니다.
이를 통해 갈등보다는 협력을, 분열보다는 통합을 선택하게 됩니다.
핵심 교훈: 사회와 자연을 하나로 보는 시각은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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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단계: 실천으로 이어지는 깨달음
"모두가 하나"라는 통찰은 단순히 깨달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타인의 역할을 존중하고,
공동체적 협력과 연대를 실천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핵심 교훈: 깨달음은 실천을 통해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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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모두가 하나, 함께 살아가는 길
사회와 자연, 그리고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된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입니다. 이를 깨닫고 실천할 때, 우리는 개인을 넘어 공동체, 지구 전체를 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작은 깨달음에서 시작된 변화가 세상을 밝히는 큰 빛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깨달음을 실천하고 있나요? 각자의 자리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요? 함께 생각을 나누어 보세요!
8 months ago | [YT]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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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치 해탈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기: 다양성의 시대를 향하여
우리는 매일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틀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잘생겼다/못생겼다", "부자/가난한 자", "맞다/틀리다"와 같은 단순한 대립 구조는 우리의 사고를 한정하고 세상을 단순화한다. 하지만 이런 흑백 논리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왜 우리는 복잡한 세상을 이렇게 단순화하려는 걸까?
이분법적 사고는 우리의 본능적인 사고방식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으로 학습된 결과다. 산업화 시대를 떠올려보자. 효율성과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간과 자원을 규격화해야 했던 시대였다. 사회는 대량 생산과 소비를 위해 사람들을 "필요하다/필요하지 않다", "좋다/나쁘다"로 분류했다. 교육 시스템 또한 여기에 맞춰 단순하고 명확한 정답과 오답의 틀을 만들어냈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는 복잡한 문제를 이분법적으로 단순화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다. 단순화된 사고는 복잡한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사회적 불평등은 경제적 요인, 역사적 맥락, 정책적 실패 등 다양한 요소가 얽혀 있는 복합적인 문제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부자는 이기적이다", "가난한 사람은 노력이 부족하다"와 같은 단순한 결론을 내린다. 이런 사고방식은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고, 갈등과 오해를 증폭시킨다.
이분법적 사고는 개인의 정체성과 다양성도 억압한다. 예를 들어, "잘생긴 사람이 성공한다"는 고정관념은 외모라는 단일한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게 만든다. 이는 개인의 고유한 재능과 가치를 무시하고, 특정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낙오자로 몰아가는 결과를 초래한다. 다양성이 존중되지 않는 사회는 혁신과 창의성을 잃고, 정체된 사고에 갇히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우선, 세상을 복합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길러야 한다. 모든 현상은 다양한 요인이 얽혀 상호작용하며 발생한다. 문제를 단순히 흑과 백으로 나누기보다는 그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관점과 맥락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개인적인 삶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제 해결에서도 중요한 접근법이다.
또한, 교육과 문화에서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강조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정답을 주입하기보다는 질문하고 탐구하는 방식을 가르쳐야 한다. 예를 들어, "이것이 맞다"고 가르치기보다 "왜 이것이 맞을까?" 또는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상호작용과 협력을 통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갈등은 다른 의견을 배척할 때 발생한다. 그러나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에서 배울 점을 찾는다면, 갈등은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너는 틀렸어"라고 말하기보다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야?"라고 질문하는 태도를 가져보자. 이는 서로를 이해하는 첫걸음이 된다.
결론적으로, 이분법적 사고는 우리 사회의 역사적 산물이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복잡한 세상에서는 단순한 흑백 논리를 넘어서, 다양한 관점과 맥락을 고려하는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잘생겼다/못생겼다, 부자/가난한 자와 같은 단순한 대립을 넘어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로 나아갈 때, 우리는 개인과 사회 모두의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옳다/그르다"를 넘어 "다르다"를 받아들이는 사회는 진정한 발전과 조화의 기반을 다질 수 있다.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규격화된 사고방식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이분법적 사고는 편리함을 제공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억압한 다양성과 가능성은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다. 현대 사회는 점점 더 복잡하고 상호의존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경제, 기술, 환경,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차원적이고 통합적인 사고가 요구된다.
새로운 사고방식은 단지 사회적 변화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삶에서도 우리는 더 풍요로운 관계와 경험을 위해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 자신과 타인을 단순히 "좋다/나쁘다"로 판단하기보다는, 서로의 고유함과 맥락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 깊은 인간관계를 맺고, 진정한 자기 성장의 길을 찾을 수 있다.
결국,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려는 노력은 개인과 사회 모두에게 도전이자 기회다. 우리는 서로 다른 생각과 관점을 존중하며, 다름에서 배우고 협력함으로써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 다차원적인 사고와 다양성의 존중은 우리를 더 큰 가능성과 조화로 이끌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단순하다. "이것이 옳은가?"라는 질문에서 "이것이 다를 수 있는가?"로 사고를 확장해보는 것이다. 이 질문이야말로 개인과 사회를 새로운 시대로 이끄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8 months ago | [YT]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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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치 해탈
모두들 찾 열심히들 산다. 우리 사회에 보면은 참 열심히들 산다. 모두가 열심히 살아가는 것을 보면은 내가 무엇을 도와주고 싶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려주고 어떻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어떠한 이유로 해서 일어난 다는 것을 알면을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없이 즐거움만 있을 것 같은데 이를 전해줄 수가 없다. 이는 내가 해보니 우리 사회의 모든 것들을 이해를 하는 것에서 시작을 한다는 것에 있다.
이는 어느 한 종목에서 이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이해가 되어야 그 스토리가 연결이 되면서 우리 사회 전반이 이해가 되면서 전체의 그림이 그려진다. 이를 알려준다고 해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코끼리를 한 번도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아무리 코끼리를 설명을 해서 어떻게 코끼리를 이해를 할까? 알 수가 없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일들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 사회가 이렇게 잘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어린 친구들이 너무나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은 정말 이쁘고 사랑스럽고 멋지게 보인다. 이런 친구들이 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시장을 이해를 하면은 정말 좋은 것 같은데 이게 그렇게 쉽게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나도 어렸을 때에 어떻게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몰라서 정말 미친 듯이 일만 했는데 일과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지만 젊었을 때 애야 하는 공부는 따로 있는 것 같다.
그 공부가 끝나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이해가 가면서 삶을 주인공으로 보람과 의미가 있는 인생을 만들면서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런 게 이것을 이해를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다양한 공부가 되어야 하는데 이를 모르면 지금 광화문과 다양한 광장 정치로 나를 끌려다니면서 나의 인생의 진검 다리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이 우리 사회와 인성교육이 다 된 사람은 남은 인생은 여여한 인생 신선 같은 삶이 만들어지는 자신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와 환경이 다 나를 위해서 움직이는데 내가 그 움직임을 쓰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있을 뿐이다. 사회와 환경들은 다 자신들의 할 일을 하고 있는데 우리 인간들만 그것을 모르고 어리석은 시간을 보매고 있는 것이 너무나 웃푸다.
8 months ago | [YT]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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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치 해탈
내 맘대로 안 되는 세상이 나를 살린다
우리는 자주 자책에 빠진다. 내가 부족해서, 내가 잘못해서, 내가 더 노력하지 않아서… 하지만 정말 그럴까? 자책이라는 것이 단순히 나 자신을 향한 공격일까? 아니면 세상을 향한 불만과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부메랑처럼 나에게 되돌아오는 아픔일까? 나는 자책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아닌 남과 세상을 미워하는 데서 비롯된 고통이었다.
세상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정상이다. 만약 내 마음대로만 되는 세상이 있다면, 그 세상은 욕심으로 뒤엉켜 삐걱거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이미 조상들의 지혜와 자연의 섭리로 잘 균형 잡혀 있다. 내가 모르는 것, 닿지 못하는 것을 탓하거나 미워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을 이해한 만큼만 활용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여유롭고 조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미움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사랑을 몰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찾고 헤맨다. 사랑을 받으려고 애쓰고, 사랑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한다. 하지만 사랑은 받으려 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내가 먼저 줄 때, 그 사랑이 상대 안에서 씨앗처럼 자라나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내 안에 사랑이 없다면,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진정한 사랑을 받을 수 없다. 사랑은 내가 주는 만큼 흘러가고, 흘러간 만큼 나에게 돌아온다.
남을 미워할 때, 우리는 그 미움의 고통을 스스로 짊어진다. 미움은 상대를 해치기보다 나를 병들게 한다. 마찬가지로, 사랑을 주지 못할 때, 우리는 그 빈자리를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남을 미워하지 않아야 한다. 그 이유는 단지 도덕적 가르침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받아들여야 할 첫 번째 진실은, 세상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 진실을 인정하면 우리는 더 이상 세상과 싸우지 않게 된다. 대신, 세상과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해는 자유를 준다. 이해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벽처럼 느껴지지만, 이해하면 그 벽이 문으로 변한다.
자연은 한 번도 나를 배신한 적이 없다. 세상도 마찬가지다. 내가 미움과 불평불만으로 스스로를 망가뜨리지 않는다면, 세상은 그 자체로 나를 살리고, 나를 이롭게 한다. 내가 사랑을 줄 때, 사랑은 나를 통해 세상에 흘러가고,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 그러니 나는 내 마음에 묻는다. “내 안에 사랑이 있는가? 내가 사랑을 주고 있는가?” 그리고 이 질문의 답을 찾을 때,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사랑은 내가 흘려보낼 때 비로소 나에게 오는 것이다.
8 months ago | [YT]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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