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29일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983년 11월 4일. 우크라이나 헤르손주 노바 블라흐비첸가 마을에 ‘옥시나 말리야’라는 이름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부모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 모두 알코올 중독자라서 이 아이가 3살 때부터 대형 개 사육장에서 사람의 보호가 아닌 개들의 보호를 받으며 자란 것입니다. 부모의 방치 속에 5년 동안 개 사료를 먹고, 개들의 보살핌으로 살아남았습니다.
1991년, 경찰과 사회복지사에게 발견되었습니다. 이때 이 아이는 두 발이 아닌 네 발로만 걷고 뛰었으며, 개처럼 짖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늑대 소녀, 개 소녀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 뒤 언어 교육과 사회 적응 훈련을 받았지만, 정상적인 언어 발달에 제한적이었고 성인이 되어서도 유치원생 수준의 언어 수준에 머물 뿐이었습니다.
이 아이를 통해, 사람들은 확실히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인간과 함께 살아야 가능했습니다. 동물과 함께 살면 어떨까요? 또 혼자 살면 과연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요? 모두 인간답게 살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산다면 어떨까요? 하느님을 닮게 됩니다.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를 도와주는 존재를 보내 주십니다. 바로 천사입니다. 이 천사 가운데 대표적인 세 천사가 오늘 우리가 축일로 기념하는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입니다. 천사는 보이지 않는 존재이므로, 그들이 맡은 임무에 따라 이름을 붙입니다. ‘하느님의 힘’으로 국가를 수호하는 대천사가 성 미카엘,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이’로 예언의 뜻을 알려주는 대천사가 성 가브리엘, ‘하느님의 치유’로 우리를 살려 주고 안내하는 대천사가 성 라파엘입니다. 이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닮아 거룩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 거짓 없는 이’라고 말씀하시지요. 그가 율법과 전통에 충실하고, 마음이 순수하며, 위선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이 바로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삶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1)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대천사의 도움으로 우리는 충분히 하느님과 함께하며 하느님을 닮을 수 있게 됩니다. 거룩한 삶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가까워질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가장 중요한 것은 감동 받는 것, 사랑하는 것, 희망하는 것, 떨리는 것, 사는 것이다. 예술가가 되기 전에 사람이 돼라(오귀스트 로댕).
2025년 9월 27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빠다킹 신부(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리나라는 해외에서도 인정하는 안전한 나라입니다. 일반 치안이나 범죄율이 매우 낮으며, 해외 여행자들의 경험담을 보면 총기나 강도 사례가 거의 없으며 소매치기조차 없다고 소개합니다. 심지어 카페에 휴대전화를 놓고 가도 그 누구도 가져가지 않는 정직한 나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국제 안전 지표에서도 늘 상위권입니다.
이렇게 안전한 나라인데도, 솔직히 약간 음침한 곳에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때 뒷골목에서 깡패를 만나서 매 맞고 돈 빼앗긴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50원밖에 없다고 ‘열중쉬어’하고 맞았습니다). 그 기억 때문에 지금 뒷골목이 안전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가고 싶지 않습니다. 뒷골목만 들어서면 그때의 일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자그마치 40년도 더 넘은 일인데도 말입니다.
부정적인 일이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자기 삶에서 지울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 보시니 참 좋은 세상인데, 부정적인 기억이 그 좋음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긍정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 되며,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완성해 나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긍정의 뉴스가 가득했으면 합니다. 폭력적이고 부정적인 뉴스가 사라지는 세상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표징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놀라움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의 위대함’에만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움은 또 다른 부정적인 놀라움에 지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순간 뒤에 십자가의 길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사람들은 모두 부정적인 마음으로 변하고 맙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떠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모두의 구원이 열린 것이지요.
영광스러운 기적만 바라보려 하면, 어느 순간에 부정적인 마음으로 변하고 맙니다. 주님의 가려진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루카 9,45 참조). 주님께서는 어떤 순간에서도 주님의 뜻을 찾을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십자가라는 고통과 시련이 주어지는 순간에서도 주님의 뜻을 찾는 사람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구원의 길에 확실하게 들어설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의 휴식이 쓸데없는 시간 낭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휴식은 곧 회복인 것이다(데일 카네기).
드디어 성지순례를 모두 마치고, 오늘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열흘간의 일정이 눈깜빡할 사이에 지나간 것 같습니다. 이제 이곳 성지에서 얻은 힘으로 다시 저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야 하겠지요. 금요일 오후에 한국 도착 예정이라, 이렇게 새벽 묵상 글을 미리 올립니다. 한국에서 뵙겠습니다.
지금도 잘 이해되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긴장하지 마세요.”라는 말입니다. 병원에서 주사 맞을 때, 간호사는 이렇게 말하지요. “긴장하지 마세요. 긴장하면 바늘이 안 들어갈 수 있어요.” 한의사가 침을 놓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자기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바늘이나 침에 긴장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나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바늘 들어갑니다. 조금 따끔할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아프지는 않아요.”
“이 바늘이 조금 두꺼워서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에요.”
어떻게 말해야 진짜 긴장을 풀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런 말을 쉽게 말하곤 합니다.
“아파하지 마. 신경 쓰지 마. 내버려둬.”
그러면서 아파하는 사람을, 신경 쓰는 사람을, 내버려두지 못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자기 말이 더 아프게 하고, 신경 쓰게 만들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아파하지 않고, 신경 쓰지 않아야 하는 것, 또 내버려두는 것은 당사자의 몫일 뿐입니다. 이를 나의 말과 행동으로 억지로 만들 수 없기에 우리는 그저 따뜻한 말로 인정하고 지지하고 격려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사랑을 말씀하시고 당신 삶으로 그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보다 사랑에 집중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여러 소문을 전합니다.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 살아났다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가 되살아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사람들의 인식이 예수님을 특별한 인물, 하느님과 관련된 인물로 보았지만, 그분의 참된 정체성에는 이르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과거의 틀 안에서 예수님을 이해하려고 할 뿐, 새로운 구원자이신 주님의 본모습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 각자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하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20)
군중의 여론이나 소문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을 누구로 믿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베드로의 고백처럼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답변할 수 있다면, 절대로 주님의 뜻에 반하는 삶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철저하게 사랑에 집중하면서, 다른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지 않게 됩니다. 진정한 위로와 힘이 나는 응원을 이웃들에게 힘차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언제나 초심자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매 순간을 새롭고 신선하게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행복한 경지를 맛본다(조셉 골드 스타인).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 영주는 큰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그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하고 당황합니다.
그의 마음 한편에서는 예수님을 ‘만나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이 저지른 죄, 즉 의로운 예언자 요한의 목을 벤 기억이 그의 눈을 가립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면, 자신의 끔찍한 죄가 그 거룩한 빛 앞에서 낱낱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그저 ‘다시 살아난 요한’이나 ‘엘리야’, 혹은 ‘옛 예언자’ 정도로만 생각하려 합니다.
그의 죄가 그의 영적인 눈을 멀게 하여,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교만이라는 죄는 우리가 얼마나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 죄는 어떻게 정화될 수 있을까요?
아이의 죄는 어떻게 사라집니까? 바로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더 깊이 알아갈 때입니다.
아이는 부모의 사랑과 희생을 알아갈수록 겸손해집니다. ‘내가 무엇이길래, 부모님께서 나를 위해 이런 고생을 하실까?’ 하는 깨달음이 아이의 교만한 자아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감사와 사랑이 싹트게 합니다. 교만이 죄라면, 겸손은 깨끗함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부모를 더 알고 사랑하는 만큼 더 깨끗해집니다.
그러나 만약 부모를 알아갈 방법이 없다면, 혹은 부모의 사랑을 오해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영혼은 정화되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나쁜 길로 빠져들고 맙니다.
영화 ‘조커’의 주인공 아서 플렉을 보십시오. 그는 코미디언을 꿈꾸지만, 정신 질환과 가난, 그리고 사람들의 냉대 속에서 고통받습니다. 그를 지탱하는 유일한 희망은, 자신이 어린 시절 입양되었던 고담시의 가장 유력한 인물, 토머스 웨인이 자신의 친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환상입니다.
그는 자신의 뿌리, 자신의 아버지를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진실은 잔혹했습니다. 그는 토머스 웨인의 아들이 아니었고, 심지어 자신을 입양한 어머니로부터 끔찍한 학대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를 사랑하고 보호해 주어야 할 부모가, 오히려 그를 파괴했던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확인할 길이 막혀버린 그는, 세상을 향한 마지막 신뢰의 끈을 놓아버립니다.
그는 더 이상 사랑받는 아들이 아니라, 세상에 버려진 고아였습니다.
그 순간, 그의 내면에 있던 모든 분노와 증오가 폭발하고, 그는 희대의 악당 ‘조커’로 변해갑니다.
그는 부모를 알아갈 기회를 박탈당했기에, 정화되지 못하고 파멸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반면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6.25 전쟁 때 흥남부두에서 아버지와 헤어지며, “이제부터 네가 가장이다. 가족들을 잘 지켜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을 평생의 짐이자 사명으로 안고 살아갑니다.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독일의 광부가 되고, 베트남 전쟁의 기술자가 되어 목숨을 걸고 돈을 법니다. 그의 평생은 가족을 위한 희생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통해 평생을 찾아 헤맸던 막냇동생을 기적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동생을 통해,
아버지가 자신과 막냇동생을 구하기 위해 배에서 내렸다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아버지가 자신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치셨다는 것을 깨닫고는 통곡합니다.
아버지의 희생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고, 평생 자신을 짓눌렀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얻게 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영적인 삶도 이와 똑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더 알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죄에서 용서받고 정화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결코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그분의 사랑을 알아가려는 노력 없이는, 우리는 결코 죄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매일 부모와 함께 살며 부모를 알아가듯이, 우리도 매일 미사와 기도를 통해 주님을 더 알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깨끗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알아가지 않으면 깨끗해질 방법이 없듯이, 우리도 창조자를 알아가는 것 외에는 죄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루카 8,21)
여기서 '이 사람들'이라고 불린 이들은 누구인가?
곧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제자들과 어린 아이와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를 당신과 동일시 하셨습니다(마태 10,40; 루카 9,48; 마태 25,40).
그러나 '내 어머니'라고 칭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단지 십자가 아래서는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하시며 맡기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을 가리켜 '내 어머니'라고 부르시며, 당신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말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는 이들’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뽑으실 때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마르 3,14)라고 말씀하셨고, 최후만찬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받아들이기 어렵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달콤하지 않아도, 손해 보더라도,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함께 하는 동행자요 동반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과 함께 있되,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다른 누구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성당이나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그분의 말이 합당하지 않아 보여도, 또 자신이 손해 볼 줄을 빤히 알면서도,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음과 사랑으로 따르는 이들입니다.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는 이들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가족’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말씀을 듣고 순명하는 이들'입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이가 아니라, 부르신 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입니다.
곧 자신의 뜻을 버리는 이요, 임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이들입니다.
바로 그들 안에서 잉태된 말씀이 탄생됩니다. 그러니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 ‘어머니’가 됩니다.
비로소 ‘말씀을 탄생시키는 말씀의 어머니’가 됩니다.
곧 ‘말씀을 이루는 이’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자매가 됩니다.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됩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당신 말씀 아래에 있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루카 8,21)
주님!
저희가 당신으로 하여 모였고 당신으로 하여 함께 사오니, 늘 당신 집 안에 함께 있게 하소서!
2025년 9월 20일 토요일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우리의 삶의 현장이 신앙을 증거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1784년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후부터 1886년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기까지, 약 100년 동안에 순교한 이들 중에 11명의 성직자와 92명의 평신도, 모두 103 위께서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되었고, 그 외에도 약 1만 명의 순교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오늘은 성인품에 오르지 않은 모든 순교자들을 포함하여 기념하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순교자들이 살았던 그 당시의 법은 부정부패와 약자에 대한 횡포를 방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질서, 곧 정의와 자비와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그 당시의 인간과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부조리를 한 순간에 걷어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는 일이었으며, 진정한 사회 개혁 운동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의인들이 비록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더라도 하느님과 함께 사랑 속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하며, 제2독서는 세상의 어떠한 세력도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사랑의 대헌장'을 들려줍니다.
이는 순교의 본질이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에 있음을 밝혀줍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믿음을 굽히지 않고, 모진 형벌을 당하고, 목숨을 바쳤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교부 테리툴리아누스가 말한대로, '순교는 믿는 이들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사랑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곧 하느님 사랑은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사랑하시고 고통을 통하여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 위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우리 앞에 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것을, 또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동행하시며, 고통 속에서 함께 고통당하시면서 사랑하기를 가르쳐주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선조들이 걸은 이 '순교'의 길은 비록 그 모습은 다르다 할지라도, 바로 오늘날 우리가 걸어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 길은 오늘 복음에 말씀하신 것처럼,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루카 9,23)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순교와 희생의 삶이 일회적이 아닌 연속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순교는 매일의 삶 속에 벌어지는 지속적인 사건이요, 또한 '참된 삶은 긴 순교'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지속적으로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봉헌하고 자신의 뜻을 바치는 백색 순교와 진리와 이웃을 위해 매일의 삶 안에서 자신을 나누는 봉사와 사랑의 녹색 순교로 죽음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본회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르는 것은 죽음에로 부르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순교 정신을 되살려 '순교'(martyr; 증거)라는 말 뜻 그대로, 우리의 삶의 현장이 신앙을 증거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루카 9,23)
주님!
제 자신을 버리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 당신이 이끌어주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이 길을 갑니다.
팔금여사tv
2025년 9월 29일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983년 11월 4일. 우크라이나 헤르손주 노바 블라흐비첸가 마을에 ‘옥시나 말리야’라는 이름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부모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 모두 알코올 중독자라서 이 아이가 3살 때부터 대형 개 사육장에서 사람의 보호가 아닌 개들의 보호를 받으며 자란 것입니다. 부모의 방치 속에 5년 동안 개 사료를 먹고, 개들의 보살핌으로 살아남았습니다.
1991년, 경찰과 사회복지사에게 발견되었습니다. 이때 이 아이는 두 발이 아닌 네 발로만 걷고 뛰었으며, 개처럼 짖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늑대 소녀, 개 소녀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 뒤 언어 교육과 사회 적응 훈련을 받았지만, 정상적인 언어 발달에 제한적이었고 성인이 되어서도 유치원생 수준의 언어 수준에 머물 뿐이었습니다.
이 아이를 통해, 사람들은 확실히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인간과 함께 살아야 가능했습니다. 동물과 함께 살면 어떨까요? 또 혼자 살면 과연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요? 모두 인간답게 살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산다면 어떨까요? 하느님을 닮게 됩니다.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를 도와주는 존재를 보내 주십니다. 바로 천사입니다. 이 천사 가운데 대표적인 세 천사가 오늘 우리가 축일로 기념하는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입니다. 천사는 보이지 않는 존재이므로, 그들이 맡은 임무에 따라 이름을 붙입니다. ‘하느님의 힘’으로 국가를 수호하는 대천사가 성 미카엘,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이’로 예언의 뜻을 알려주는 대천사가 성 가브리엘, ‘하느님의 치유’로 우리를 살려 주고 안내하는 대천사가 성 라파엘입니다. 이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닮아 거룩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 거짓 없는 이’라고 말씀하시지요. 그가 율법과 전통에 충실하고, 마음이 순수하며, 위선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이 바로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삶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1)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대천사의 도움으로 우리는 충분히 하느님과 함께하며 하느님을 닮을 수 있게 됩니다. 거룩한 삶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가까워질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가장 중요한 것은 감동 받는 것, 사랑하는 것, 희망하는 것, 떨리는 것, 사는 것이다. 예술가가 되기 전에 사람이 돼라(오귀스트 로댕).
1 day ago | [YT]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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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금여사tv
2025년 9월 28일 연중 제26주일
<‘제가 자비를 베풀게 해주십시오.’>
지난 주일에 이어, 이번 주일 말씀전례의 주제도 재물의 사용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가진 자들의 흥청거림과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곧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을 위한 싸움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라고 권고합니다.
곧 티모테오에게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의로움과 ~사랑”을 추구하며,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기”를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로, 극단적인 두 인물의 대조된 모습을 통해 재물의 올가미에 사로잡힌 우리를 하느님의 말씀에로 초대합니다.
사실 이 비유의 부자는 특별한 악행을 저지른 것이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단지 소유한 자신의 재물을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과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면서도 타인을 위해 쓰는 데는 인색했습니다.
마치 제1독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가진 자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이 비유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할 바를 다한 것이 아니며, 선행과 자비를 베풀지 않음이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죄’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세계적인 거부 석유 왕 록펠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돈을 벌기보다 쓰기가 열 배는 어렵다”
그렇습니다.
그가 심판받은 것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 사랑을 하지 않은 데 있습니다.
그것은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어야 하고, 마시되 자신의 혀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재물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유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죽어서 아브라함에게 한 말인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6,24)라는 간청은 이제 ‘제가 자비를 베풀게 해주십시오.’ 라는 간청으로 바뀌어야 할 일입니다.
보십시오.
저승에서 처지가 뒤바뀐 부자는 자기 형제들에게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청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루카 16,29)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 11,28)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려는 복된 사람’, 장운철 마르티노 수사님의 첫서원 미사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강론 전에 저는 마르티노 수사님께 ‘무엇을 청하는지’를 이렇게 물었습니다.
“형제님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거룩한 교회에 무엇을 청합니까?”
그리고 마르티노 수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청하며,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더욱 온전히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은혜를 청합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앞서, '주님의 자비'를 청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자비’와 ‘주님의 동행’이 아니면 결코 갈 수 없는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러 동료들’과 ‘기도해주시는 분들’과 함께 해야 갈 수 있는 길입니다.
동시에 이 길은 ‘자비를 베풀면서 가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받아먹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베풀어야 하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한편이 무너지면, 수도생활은 활기를 잃고 맙니다.
오늘 복음인 ‘라자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부자’는 자비를 입었건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의 전형입니다.
구원의 길에서 멀어진 이의 표상입니다.
그러니 수도승은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하는 사람’, ‘기도하지 않고는 못 베기는’, ‘끊임없이 기도에 사로잡힌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 ‘유기 서원’을 하는 마르티노 수사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수도승이 되길 기원합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위대하다”는 말이 있듯이, 수사님은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하여 머물러 있음을 보여주는 표징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하느님의 살아있는 증거자가 될 수 있도록, 저희가 함께 그 길을 갈 것입니다.
그래서 수사님께서는 오늘, ‘하느님의 자비’와 ‘받은 자비를 베풀면서 하느님과 길을 함께 갈 것을 공동체 안에서 청원’하였습니다.
이제 수사님께서는 이미 받은 이 '자비'로 늘 기쁨과 평화 속에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마르티노 수사님!
복된 서원생활 되세요.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루카 16,20)
주님!
마음의 눈을 열어 타인의 처지를 볼 줄 알게 하소서.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고, 자신의 혀만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게 하소서.
재물을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않게 하시고, 탐욕에 빠지지 않고 인색하지 않게 하소서.
악을 저지르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시고,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2 days ago | [YT] |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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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27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빠다킹 신부(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리나라는 해외에서도 인정하는 안전한 나라입니다. 일반 치안이나 범죄율이 매우 낮으며, 해외 여행자들의 경험담을 보면 총기나 강도 사례가 거의 없으며 소매치기조차 없다고 소개합니다. 심지어 카페에 휴대전화를 놓고 가도 그 누구도 가져가지 않는 정직한 나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국제 안전 지표에서도 늘 상위권입니다.
이렇게 안전한 나라인데도, 솔직히 약간 음침한 곳에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때 뒷골목에서 깡패를 만나서 매 맞고 돈 빼앗긴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50원밖에 없다고 ‘열중쉬어’하고 맞았습니다). 그 기억 때문에 지금 뒷골목이 안전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가고 싶지 않습니다. 뒷골목만 들어서면 그때의 일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자그마치 40년도 더 넘은 일인데도 말입니다.
부정적인 일이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자기 삶에서 지울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 보시니 참 좋은 세상인데, 부정적인 기억이 그 좋음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긍정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 되며,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완성해 나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긍정의 뉴스가 가득했으면 합니다. 폭력적이고 부정적인 뉴스가 사라지는 세상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표징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놀라움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의 위대함’에만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움은 또 다른 부정적인 놀라움에 지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순간 뒤에 십자가의 길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사람들은 모두 부정적인 마음으로 변하고 맙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떠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모두의 구원이 열린 것이지요.
영광스러운 기적만 바라보려 하면, 어느 순간에 부정적인 마음으로 변하고 맙니다. 주님의 가려진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루카 9,45 참조). 주님께서는 어떤 순간에서도 주님의 뜻을 찾을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십자가라는 고통과 시련이 주어지는 순간에서도 주님의 뜻을 찾는 사람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구원의 길에 확실하게 들어설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의 휴식이 쓸데없는 시간 낭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휴식은 곧 회복인 것이다(데일 카네기).
3 days ago | [YT]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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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26일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작성자:빠다킹신부
드디어 성지순례를 모두 마치고, 오늘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열흘간의 일정이 눈깜빡할 사이에 지나간 것 같습니다. 이제 이곳 성지에서 얻은 힘으로 다시 저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야 하겠지요. 금요일 오후에 한국 도착 예정이라, 이렇게 새벽 묵상 글을 미리 올립니다. 한국에서 뵙겠습니다.
지금도 잘 이해되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긴장하지 마세요.”라는 말입니다. 병원에서 주사 맞을 때, 간호사는 이렇게 말하지요. “긴장하지 마세요. 긴장하면 바늘이 안 들어갈 수 있어요.” 한의사가 침을 놓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자기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바늘이나 침에 긴장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나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바늘 들어갑니다. 조금 따끔할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아프지는 않아요.”
“이 바늘이 조금 두꺼워서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에요.”
어떻게 말해야 진짜 긴장을 풀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런 말을 쉽게 말하곤 합니다.
“아파하지 마. 신경 쓰지 마. 내버려둬.”
그러면서 아파하는 사람을, 신경 쓰는 사람을, 내버려두지 못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자기 말이 더 아프게 하고, 신경 쓰게 만들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아파하지 않고, 신경 쓰지 않아야 하는 것, 또 내버려두는 것은 당사자의 몫일 뿐입니다. 이를 나의 말과 행동으로 억지로 만들 수 없기에 우리는 그저 따뜻한 말로 인정하고 지지하고 격려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사랑을 말씀하시고 당신 삶으로 그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보다 사랑에 집중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여러 소문을 전합니다.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 살아났다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가 되살아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사람들의 인식이 예수님을 특별한 인물, 하느님과 관련된 인물로 보았지만, 그분의 참된 정체성에는 이르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과거의 틀 안에서 예수님을 이해하려고 할 뿐, 새로운 구원자이신 주님의 본모습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 각자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하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20)
군중의 여론이나 소문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을 누구로 믿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베드로의 고백처럼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답변할 수 있다면, 절대로 주님의 뜻에 반하는 삶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철저하게 사랑에 집중하면서, 다른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지 않게 됩니다. 진정한 위로와 힘이 나는 응원을 이웃들에게 힘차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언제나 초심자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매 순간을 새롭고 신선하게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행복한 경지를 맛본다(조셉 골드 스타인).
4 days ago | [YT]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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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다해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혼자서는 깨끗해질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 영주는 큰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그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하고 당황합니다.
그의 마음 한편에서는 예수님을 ‘만나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이 저지른 죄, 즉 의로운 예언자 요한의 목을 벤 기억이 그의 눈을 가립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면, 자신의 끔찍한 죄가 그 거룩한 빛 앞에서 낱낱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그저 ‘다시 살아난 요한’이나 ‘엘리야’, 혹은 ‘옛 예언자’ 정도로만 생각하려 합니다.
그의 죄가 그의 영적인 눈을 멀게 하여,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교만이라는 죄는 우리가 얼마나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 죄는 어떻게 정화될 수 있을까요?
아이의 죄는 어떻게 사라집니까? 바로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더 깊이 알아갈 때입니다.
아이는 부모의 사랑과 희생을 알아갈수록 겸손해집니다. ‘내가 무엇이길래, 부모님께서 나를 위해
이런 고생을 하실까?’ 하는 깨달음이 아이의 교만한 자아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감사와 사랑이
싹트게 합니다. 교만이 죄라면, 겸손은 깨끗함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부모를 더 알고 사랑하는 만큼
더 깨끗해집니다.
그러나 만약 부모를 알아갈 방법이 없다면, 혹은 부모의 사랑을 오해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영혼은 정화되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나쁜 길로 빠져들고 맙니다.
영화 ‘조커’의 주인공 아서 플렉을 보십시오. 그는 코미디언을 꿈꾸지만, 정신 질환과 가난, 그리고
사람들의 냉대 속에서 고통받습니다. 그를 지탱하는 유일한 희망은, 자신이 어린 시절 입양되었던
고담시의 가장 유력한 인물, 토머스 웨인이 자신의 친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환상입니다.
그는 자신의 뿌리, 자신의 아버지를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진실은 잔혹했습니다. 그는 토머스 웨인의 아들이 아니었고, 심지어 자신을 입양한
어머니로부터 끔찍한 학대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를 사랑하고 보호해 주어야 할 부모가,
오히려 그를 파괴했던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확인할 길이 막혀버린 그는, 세상을 향한 마지막
신뢰의 끈을 놓아버립니다.
그는 더 이상 사랑받는 아들이 아니라, 세상에 버려진 고아였습니다.
그 순간, 그의 내면에 있던 모든 분노와 증오가 폭발하고, 그는 희대의 악당 ‘조커’로 변해갑니다.
그는 부모를 알아갈 기회를 박탈당했기에, 정화되지 못하고 파멸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반면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6.25 전쟁 때 흥남부두에서 아버지와 헤어지며,
“이제부터 네가 가장이다. 가족들을 잘 지켜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을 평생의 짐이자 사명으로 안고
살아갑니다.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독일의 광부가 되고, 베트남 전쟁의 기술자가 되어 목숨을 걸고
돈을 법니다. 그의 평생은 가족을 위한 희생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통해 평생을 찾아 헤맸던 막냇동생을 기적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동생을 통해,
아버지가 자신과 막냇동생을 구하기 위해 배에서 내렸다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아버지가 자신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치셨다는 것을 깨닫고는 통곡합니다.
아버지의 희생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고, 평생 자신을 짓눌렀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얻게 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영적인 삶도 이와 똑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더 알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죄에서 용서받고 정화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결코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그분의 사랑을 알아가려는 노력 없이는,
우리는 결코 죄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매일 부모와 함께 살며 부모를 알아가듯이, 우리도 매일 미사와 기도를 통해 주님을 더
알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깨끗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알아가지 않으면 깨끗해질 방법이 없듯이,
우리도 창조자를 알아가는 것 외에는 죄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 days ago | [YT] |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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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24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사명을 수행하라>
오늘 복음은 열 두 제자의 파견 장면입니다.
이는 세 가지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기 이전의 장면, 파견하시는 장면, 그리고 파견 받은 이들이 그 사명을 이루는 장면입니다.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먼저 사랑으로 그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냥 보낸 것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과 권한을 부여하시어 파견하십니다.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루카 9,1)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가르쳐주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루카 9,3)
그렇습니다.
길을 떠나면서 그 어떤 다른 것을 가지고 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닐 필요가 없습니다.
몸 걱정도, 치장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져야 할 것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칠 힘도 권한도, 말씀도, 예수님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도 이미 이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왜 그 권능이 우리에게서는 드러나지 않을까?
그것은 우리가 무능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바오로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2코린 12,9)
이는 우리의 초라함, 우리의 무능함, 우리의 허약함이 당신의 권능을 더욱 더 드러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능력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앞세우기에, 결국 그분의 권능이 드러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능력에 집착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장면에서, 파견 받은 자들이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알리고, 그 증거로 병든 자들을 고쳐주도록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었다.'
(루카 9,6)
오늘 우리도 분명 예수님께 파견 받은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 그분의 권능이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이들에게서는 치유가 일어나고 질병이 고쳐져야 할 것입니다.
만약 나를 만나는 이들에게서 치유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내가 무능하지 않으려 하고 오히려 능력을 부리려다 하느님의 권능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지 살펴보아야 할 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길을 떠날 때에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루카 9,3)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 할 것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6 days ago | [YT] |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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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23일 화요일 ·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예수님의 가족’>
오늘 복음은 '말씀을 실행하는 이'가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됨을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루카 8,21)
여기서 '이 사람들'이라고 불린 이들은 누구인가?
곧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제자들과 어린 아이와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를 당신과 동일시 하셨습니다(마태 10,40; 루카 9,48; 마태 25,40).
그러나 '내 어머니'라고 칭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단지 십자가 아래서는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하시며 맡기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을 가리켜 '내 어머니'라고 부르시며, 당신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말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는 이들’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뽑으실 때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마르 3,14)라고 말씀하셨고, 최후만찬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받아들이기 어렵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달콤하지 않아도, 손해 보더라도,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함께 하는 동행자요 동반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과 함께 있되,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다른 누구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성당이나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그분의 말이 합당하지 않아 보여도, 또 자신이 손해 볼 줄을 빤히 알면서도,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음과 사랑으로 따르는 이들입니다.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는 이들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가족’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말씀을 듣고 순명하는 이들'입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이가 아니라, 부르신 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입니다.
곧 자신의 뜻을 버리는 이요, 임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이들입니다.
바로 그들 안에서 잉태된 말씀이 탄생됩니다.
그러니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 ‘어머니’가 됩니다.
비로소 ‘말씀을 탄생시키는 말씀의 어머니’가 됩니다.
곧 ‘말씀을 이루는 이’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자매가 됩니다.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됩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당신 말씀 아래에 있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루카 8,21)
주님!
저희가 당신으로 하여 모였고 당신으로 하여 함께 사오니, 늘 당신 집 안에 함께 있게 하소서!
함께 있되, 당신 말씀을 귀 기울여 듣게 하소서!
귀 기울여 듣되, 순명하여 실행하게 하소서!
오늘도 저를 약하고 가난하게 하시어, 당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1 week ago | [YT] |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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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금여사tv
2025년 9월 22일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말씀'은 숨겨 덮어지지도 감추어 가려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씨 부리는 사람의 비유'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 말씀은 ‘말씀을 들은 자에 대한 지시사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사항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루카 8,16)
여기에서 ‘등불’은 하느님 말씀을 비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말씀’이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요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그릇’은 영혼의 능력을, ‘침상’은 몸을, ‘등경’은 거룩한 교회를 표현한다고 해설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그것은 세상 만민을 비추고, 진리의 빛으로 집 안에 있는 이들을 밝히며, 모든 사람의 마음을 거룩한 지식으로 채우게 된다.”
그러니 '침상'인 우리의 몸으로 말씀을 가려서는 안 될 일입니다.
또한 '그릇'인 우리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덮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사실 '말씀'은 숨겨 덮어지지도, 감추어 가려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마태 5,14)처럼 감추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집안을 가장 잘 비출 수 있는 곳에 거룩한 교회인 '등경'을 올려놓고, 말씀인 '등불'을 켜서 밝혀두어야 할 일입니다.
'말씀'은 빛이 되어 온 집 안과 집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비추어 밝혀줄 것입니다.
그 빛은 우리의 뼈와 살을 가르고, 우리의 생각과 속셈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숨겨진 것들을 드러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루카 8,17)
이토록 ‘말씀’은 빛이 되어 세상과 우리를 비출 것입니다.
그리고 빛과 진리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말씀의 등불'은 거룩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진정, 말씀의 비추임을 받은 영혼은 더욱 더 많은 열매를 맺고 더 밝게 빛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루카 8,18)
그렇습니다.
단지 듣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마치, 율법학자가 “스승님,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하고 여쭈었을 때, 예수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루카 10,26)라고 되물었던 것처럼.)
곧 믿음과 사랑으로 희망하여 들어야 하고,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지향하여 듣는 일, 곧 들은 바를 믿고, 믿는 바를 응답으로 실천함으로써 말씀이 성취되게 하는 일입니다(이를 ‘렉시오 디비나’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루카 8,18)이라는 말씀을 알아듣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루카 8,16)
주님!
당신 말씀은 저의 등불입니다.
제 알량한 지식이나 능력으로 당신 등불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제 몸으로 당신 빛을 가리지 않게 하소서!
당신 빛은 결코 덮어질 수도 가려질 수도 없는 까닭입니다.
제 영혼 위에 등경을 올려놓고 등불이 제 온몸을 비추어 제가 항상 당신 빛 안에 있게 하소서!
당신 빛으로 저를 밝혀주시고 빛을 받는 만큼 더욱 더 밝아지게 하소서!
제 뼈와 살을 가르고, 제 생각과 속셈을 밝히시어, 제 안에 어둠을 몰아내시고 숨겨진 것은 환희 드러내소서.
말씀의 비추심으로 더욱 더 많은 열매를 맺고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게 하소서!
아멘.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1 week ago | [YT] |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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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금여사tv
2025년 9월 21일 연중 제25주일
<지금 나는 대체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재물'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재물은 우리에게 선물임과 동시에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재물을 관리해야 하는가?”를 넘어서, “재물의 원 주인은 누구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아모스는 빈곤한 이들을 짓밟고 망하게 하는 이들, 곧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착취의 참상을 고발하는 한편, 그들을 잊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신심 깊고 품위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일임을 말하면서,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중개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계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약은 집사의 비유와 해설'입니다.
여기에서는 재물과 맺는 관계가 결국은 하느님 및 이웃들과의 관계를 결정짓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비유 속의 집사는 주인의 재물을 횡령했습니다.
곧 관리인으로서의 자신의 신원을 망각하고 관리를 맡기신 분의 뜻을 거역하였고, 맡겨진 재물을 자신의 뜻에 따라 써버리고 낭비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를 “집사 일을 그만두게” 하자,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와 지금 있는 ‘자리’,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자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지금 있는 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지? ~옳지, 이렇게 하자.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 16,3-4)하고 자신에게 질문하고 대처합니다.
그는 비록 불의한 관리인었지만, 지혜로운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잔머리를 굴려 마지막 한 몫을 더 챙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나누었습니다.
쌓아놓은 재물을 나누며, 움켜쥐었던 것을 내어주었습니다.
횡령하고 착복했던 것을 아낌없이 퍼주었습니다.
주인처럼, 아버지처럼,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를 그들의 집으로 맞아들이도록 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루카 12,42)라는 질문을 떠올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루카 16,12)
그러니 이 비유는 결코 약삭빠른 청지기의 처신이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자녀들도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건만, 그렇지 못하고 있는 빛의 자녀들의 삶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실 ‘재물’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앙의 진실성’을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루카 16,13)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이신 한 분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곧 ‘물질’이나 ‘자기 자신’ 등의 피조물을 섬기거나 자기의 판단이나 의견이나 뜻을 섬기지 않고, 주인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은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일이요, 모독하는 일이요, 우상숭배가 됩니다.
사실 ‘섬김’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의 신원과 정체성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주님께 속하며, 주님을 섬기고 따를 것입니다.
물질에 지배당한 사람은 물질을, 자기 자신에 지배당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뜻과 생각을 주인처럼 섬기고 따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가 주님께 속해 있고,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음을 깨닫고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지금 나는 대체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
참된 주인이신 하느님인가?
물질이나 자기 자신의 생각과 뜻이라는 우상인가?
주님!
당신보다 제 자신과 재물을 앞세우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보다 당신의 선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소유하는 존재이기에 앞서, 소유된 존재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재물도 자신도 관리할 뿐, 결코 소유할 수 없음을 알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어떻게 하지? ~ 옳지, 이렇게 하자.”
(루카 16,3-4)
주님!
제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재물과 소유를 횡령했습니다.
제 자신을 마치 저의 것인 양 횡령했습니다.
입으로는 당신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제 자신을 주인인 양 섬겼습니다.
진정, 당신이 맡기신 이 몸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이 저의 주님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를 옭아매는 자애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아멘.
(이영근 아오스딩)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1 week ago | [YT] |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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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금여사tv
2025년 9월 20일 토요일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우리의 삶의 현장이 신앙을 증거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1784년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후부터 1886년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기까지, 약 100년 동안에 순교한 이들 중에 11명의 성직자와 92명의 평신도, 모두 103 위께서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되었고, 그 외에도 약 1만 명의 순교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오늘은 성인품에 오르지 않은 모든 순교자들을 포함하여 기념하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순교자들이 살았던 그 당시의 법은 부정부패와 약자에 대한 횡포를 방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질서, 곧 정의와 자비와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그 당시의 인간과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부조리를 한 순간에 걷어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는 일이었으며, 진정한 사회 개혁 운동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순교자의 피는 악마들을 묶어버리는 쇠사슬이며 악마의 목덜미를 조이는 족쇄이다”
오늘 제1독서는 의인들이 비록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더라도 하느님과 함께 사랑 속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하며, 제2독서는 세상의 어떠한 세력도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사랑의 대헌장'을 들려줍니다.
이는 순교의 본질이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에 있음을 밝혀줍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믿음을 굽히지 않고, 모진 형벌을 당하고, 목숨을 바쳤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교부 테리툴리아누스가 말한대로, '순교는 믿는 이들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사랑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곧 하느님 사랑은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사랑하시고 고통을 통하여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 위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우리 앞에 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것을, 또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동행하시며, 고통 속에서 함께 고통당하시면서 사랑하기를 가르쳐주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선조들이 걸은 이 '순교'의 길은 비록 그 모습은 다르다 할지라도, 바로 오늘날 우리가 걸어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 길은 오늘 복음에 말씀하신 것처럼,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루카 9,23)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순교와 희생의 삶이 일회적이 아닌 연속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순교는 매일의 삶 속에 벌어지는 지속적인 사건이요, 또한 '참된 삶은 긴 순교'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지속적으로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봉헌하고 자신의 뜻을 바치는 백색 순교와 진리와 이웃을 위해 매일의 삶 안에서 자신을 나누는 봉사와 사랑의 녹색 순교로 죽음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본회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르는 것은 죽음에로 부르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순교 정신을 되살려 '순교'(martyr; 증거)라는 말 뜻 그대로, 우리의 삶의 현장이 신앙을 증거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루카 9,23)
주님!
제 자신을 버리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 당신이 이끌어주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이 길을 갑니다.
제 능력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을 믿게 하소서.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께 신뢰를 두게 하소서.
제 몸에 당신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1 week ago | [YT] |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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