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주님의교회ㅣ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ㅣ김반석담임목사
◆ 예배시간 안내
주일낮예배 : 오전 11시
주일저녁예배 : 오후 7시
새 벽 예 배 : 오전 5시30분(월-금)
수요저녁예배 : 오후 7시 30분
금요일 밤 기도회 : 오후 8시 30분
◆ 2025년 기도제목
"우리에게 파종할 좋은 땅을 일으켜 주옵소서"
(내가 그들을 위하여 파종할 좋은 땅을 일으키리니그들이 다시는 그 땅에서 기근으로 멸망하지 아니할지며 다시는 여러 나라의 수치를 받지 아니할지라, 에스겔 34:29)
◆ 충남 천안시 서북구 월봉로 134 광산빌딩 2층 201호
우리는주님의교회
용서와 용서받음은 인간관계에서 불가피하지만, 인간 스스로는 진정한 용서를 할 능력이 없습니다. 세상은 용서를 정의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하며, 때로는 용서를 부도덕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용서는 전혀 다른 차원을 보여줍니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용서의 세 가지 모델이 있습니다.
값싼 은혜: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방식. 피해자의 치유를 강조하지만 죄의 심각성을 외면합니다.
인색한 은혜: 거래적 용서. 가해자가 충분히 뉘우치고 무릎 꿇어야만 용서가 가능하다고 여깁니다.
은혜 없음: 아예 용서를 배제하고 오직 정의만을 강조합니다.
이들의 문제는 모두 수직적 차원, 즉 하나님 앞에서 경험하는 용서가 빠져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 18:21-35)를 통해,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를 경험한 자가 반드시 다른 이들을 용서해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께 무한히 빚진 자가 탕감받은 사실을 깨달으면, 다른 사람의 잘못은 상대적으로 작게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과의 상대 평가 속에서 용서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절대 평가를 받는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모든 관계 속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삼각 관계"의 인식을 가질 때, 우리는 더 깊이 복음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단번에 끝나는 행위가 아니라 반복적이고 내적인 과정입니다. 팀 켈러는 이를 "외상으로 선물을 사주는 것"에 비유 합니다. 받는 사람은 즉시 누리지만, 주는 사람은 계속해서 비용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값비싼 과정은 복음을 더 깊이 경험하게 하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용서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때,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가장 분명하게 경험합니다. 결국 진정한 용서는 내적 겸손과 내적 부요를 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만 흘러나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깊이 누릴수록 용서를 피할 수 없고, 용서를 통해 복음을 증거하게 됩니다. 용서받은 자로서 용서하기를 선택하는 믿음을 구하는, 그래서 사랑으로 나아가는 길을 활짝 여시길 축복합니다.
1 week ago | [YT]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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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주님의교회
성도는 무엇을 근본적인 힘을 삼아서 살아갈까요? 심리학자 에이브라함 매슬로는 인간을 움직이는 욕구를 생리적 욕구에서 자아실현 욕구까지 다섯 단계로 설명했지만, 본질적으로 모두 '자기중심적 욕구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성도는 예외일까요? 사도 바울은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고 말합니다. 복음은 인간을 자기 중심성에서 해방시켜 주를 위해, 그리고 형제를 위해 살게 하는 새로운 동력을 우리 안에 심습니다. C.S.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자아를 찾으려 하면 잃게 되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버리면 찾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는 이 복음을 율법주의적 자기 노력이나 방임 사이에서 오해합니다. 복음을 개인적, 내면적 차원으로 축소해, 경건과 지식을 쌓지만 관계의 변화는 경험하지 못합니다. 복음은 우리 안과 밖에서 동시에 일합니다. 안으로는 죄를 절망 속에 내버려두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과의 단절을 메우며, 은혜 안에서 자유와 기쁨을 창조합니다. 밖으로는 그 기쁨이 이웃 사랑과 섬김으로 흘러가도록 만듭니다. 존 스토트가 말했듯 "참된 복음은 수직적 화해와 수평적 화해를 동시에 이룬다." 은혜를 받은 자는 자기를 부인하며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게 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심"만이 아니라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했습니다(고후 4:5). 이는 복음의 본질입니다. 그는 자유인이면서도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스스로 종이 되었고(고전 9:19), 그 힘은 자기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골 1:28-29). 이 은혜의 동력은 교회 안팎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성령의 인도는 강단의 설교뿐 아니라 평범한 성도의 따뜻한 초대와 섬김을 통해 역사합니다. 마게도냐 교회처럼(고후 8:1-2), 물질적 여유가 아니라 은혜가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회적 약자를 향한 작은 섬김도 주를 위해 그들의 종'이 되는 행위로 봅니다(마 25:40). 결국 성도의 삶을 움직이는 근본 동력은 의지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은혜가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와 믿음의 순환 속에서 새로운 기쁨을 추며, 그 기쁨이 밖으로 흘러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성기으로 나타납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시 67:1-2). 그러므로 오늘 교회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자원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은혜만이 우리를 움직이고, 세상을 향해 복음을 흘려보내게 합니다.
2 weeks ago | [YT]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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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주님의교회
우리는 각자가 사랑의 언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랑의 언어는 조금씩 다르겠지요. 게리 채프먼은 '5가지 사랑의 언어'라는 그의 책을 통해서 <인정하는 말>, <함께하는 시간>, <선물>, <봉사>, <스킨쉽> 다섯 가지의 사랑의 언어를 제시합니다. 이 사랑의 언어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사랑의 언어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의 사랑의 언어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의 사랑의 언어가 무엇인지를 알고 알맞는 사랑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 '받는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사랑의 언어를 요구하실까요? 대표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화려한 제사보다 순종이, 숫양의 기름보다 청종하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온전한 순종과 청종을 하지 못한다는 데서 발생합니다. 성경의 수많은 명령과 금지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우리가 '순종'한다는 것이 때때로는 성공하지만, 많은 경우 실패합니다. 이와 같이 연약한 우리를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복음'이라는 사랑의 언어를 가지고 우리와 '화목하시고, 교제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 이루시고, 그를 '믿음'을 통해서 누리는 방식으로 우리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순종'이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언어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지만, '순종'의 의미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믿는 것'입니다. 참된 순종에 대한 순종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사랑의 언어를 가지고 사용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언어인 '복음'에 대해서 오해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두 가지 모습이 율법주의와 방종입니다. 율법주의는 여전히 바른 행위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른 한편 방종은 우리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에 전혀 순종하지 않아 도 된다고 생각하며 율법을 무시합니다. 율법주의와 방종은 복음을 파괴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언어를 멸시 하게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진짜 순종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의 언어를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언어를 물려받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사랑함으로 진정한 의미에 사랑의 순종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1 month ago | [YT]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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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주님의교회
우리는 좁았던 시야가 넓어지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내 의견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어떤 강연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깨닫기도 하고, 책을 보다가 식견이 넓어지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 받는다는 것은 이전과 다른 시야를 갖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신 알게 됩니다. 이 두 가지는 돌이킴을 일으키고, 주님 앞에서 철저하게 낮아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면 그 어떤 방법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겪게 됩니다. 처음 회심할 때를 생각하면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복음을 통해서 살아가다보면 우리가 그 때보다 조금씩 나이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우리는 조금씩 나아지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계속 발견되어지는 죄악들에 의아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우리에게 열리게 한 시야가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을 마주하고 난 후의 우리의 삶은 나의 죄인됨을 깨닫지만, 점점 더 깨닫게 됩니다. 복음의 빛, 말씀이 비추어지면 질수록 죄악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더욱더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인식이 점점 더 높아지는 것이죠. 복음이 이끌어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점점 더 벌어지는 간극을 십자가로 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만이 그 높아지는 거룩함과 처절하게 깊어지는 죄악의 진상의 간극을 메울 수 있다는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를 깊이 생각해야만 합니다. 십자가 중심성은 십자가 확장성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하는 감각은 '내가 생각보다 훨씬 더 죄인이며, 하나님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십자가를 생각하며 거룩하게 세워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2 months ago | [YT]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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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주님의교회
2025.06.15 더없이 강하게 붙드사
우리는 종종 자신이 강하다고 느낄 때 더 큰 유혹에 빠지고, 자신이 약하다고 느낄 때 오히려 하나님을 더 가까이 찾곤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 아이러니를 누구다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 죽겠노라 큰소리쳤지만, 실제 위기가 닥쳤을 때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스스로 강하다고 믿었던 순간은 가장 무너진 순간이었고, 스스로 아무 말도 할 수 없던 자리에서 비로소 그는 주님의 손에 붙들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진짜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진짜 고난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현실을 살아가게 하는 진짜 힘이 무엇인지도 마주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그 분의 참된 은혜 위에 우리가 서 있다는 것이 바로 그 분이 우리를 붙들고 계신 현실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결코 우리를 놓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조금 더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원수들이 위협하고 공격하지만 우리를 위해서 이미 이 길을 걸어가셨고, 그 은혜 가운데 서서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할 때 나그네로서, 이 세상을 깨어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차이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를 붙드십니다. 우리를 더 없이 강하게 붙드사, 주 안에서 기동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 그 은혜 위에 서 있는, 그래서 주님의 평강이 우리를 지배하는 삶으로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2 months ago | [YT]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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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주님의교회
우리는 삶에서 이끄는 자리에 서기도, 때로는 따르는 자리에 서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끄는 자리에 섰을 때와 따르는 자리에 섰을 때 마음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종종 봅니다. 이끄는 자리에서는 겸손함으로 이끌고, 두루 살피며 세워갔는데, 따르는 자리에서는 비판적이고 이끄는 자에게 순종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곤 합니다. 오늘 본문은 고난의 현장에 있는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확실한 방향성을 가지고 이끄는 자들과 따 르는 자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어떤 상하 질서를 따라야만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끄는 자로서 때로는 따르는 자로서 언제나 우리의 삶이 한 가지 태도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목자장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끄는 자로서 많은 백성들을 이끄셨지만,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이셨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정체성과 위치는 서로 부딪치거나 배타적이지 않았습니다. 이끄는 자로서, 따르는 자로서 통합되고 일치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이끄는 자리에서 패역무도함을, 따르는 자로서 불순종과 원망을 내뱉게 만듭니다. 자기중심성은 온통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믿음이 없어 염려와 걱정에 짓눌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온전히 하나님을 따르는 삶이 곧 이끄는 삶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이루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난 중에 있는 교회가 외압과 내부의 갈등으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마침내 하나가 되게 하시는 은혜 속에서, 이끄는 자로서 따르는 자를 돌보며, 따르는 자로서 이끄는 자에게 겸손하게 순종하는 아름다운 관계가 세워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2 months ago | [YT]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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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주님의교회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우리는 종종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마주할 때, 이렇게 내뱉곤 합니다. 우리가 기대했던 방향이 막히고, 마음의 소원이 꺾일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도전했던 일인데도' 잘 풀리지 않을 때 마음은 복잡해집니다. 이상하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그 고난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여정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가 마주하는 고난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도리어 그것이 우리의 연단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연단이라는 말은 어떤 광물을 정제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뜨거운 불에 넣고, 더러운 찌꺼기를 제고하여 더 순수하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연단은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탄화목 기술이라고 나무를 일부러 태워서 나무의 강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나무를 태우면 약화시키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탄화층이 형성되어 물에 대한 저항력도 높아지고 해충도 막는 효과도 있다고 합니다. 그것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불 시험은 분명히 존재하며, 그것이 쉽게 넘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연단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먼저는 삶이 정결해집니다. 거룩한 삶으로 변화됩니다. 또한 삶을 더욱 단순하게 만듭니다. 고난이 있을 때 우선순위가 재정립이 되고, 바라보는 방향이 어지럽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놓지 못하던 것을 자연스레 내려놓고, 하나님 한 분만 붙들게 됩니다. 그것은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할 때 그와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기억할 한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9). 이 말씀처럼,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면 우리는 안심해도 됩니다. 그 고난의 끝이 절망이 아니라 영광이며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연단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심으로 우리는 우리의 연단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 의탁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은혜로 의탁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붙들고, 연단을 통하여 정금같이 나아오는 삶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2 months ago | [YT]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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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주님의교회
내 마음의 쿠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는 우 마음의 쿠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는 우리의 자존감을 지키고, 부정적인 생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마음의 쿠션을 깔아야 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마음에 상처를 많이 입습니다. 여러 말과 행동들 때문에 마음에는 멍이 들고, 상처가 납니다. 그러나 마음에 쿠션을 깔아놓는 것으로 부드럽게 받아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리스도인들은 살아가는 동안 마주하게 되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은 우리의 삶을 멍들게 만들기도, 마음에 깊은 상처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이 우리를 파괴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를 위해서 먼저,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이 계시며, 그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에 갑옷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라보고 계셨던 기쁨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을 기대하면서 가셨을까요? 우리를 얻으시는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참으셨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무장한다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서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생각한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입니다. 고난 중에는 나의 어려움이 더 극대화되고, 나에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힘과 결단으로는 고난 중에서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덧입혀지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 분의 마음을 갑옷으로 덧입는 것은 결국 우리의 마음과 생각, 능력과 결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께서 하셨던 일, 우리를 위한 일에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 그래서 더 이상 나만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고난 중에서 기꺼이 나를 괴롭게 하는 원수일지라도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오늘도 주 안에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무장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3 months ago (edited) | [YT]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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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주님의교회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세상은 점점 이기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 법까지 제정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다수 속에서 쉽게 자신을 은신하고, 숨기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나그네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지 말고, 자신을 위해서 살라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 위해서 살다가,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편한 마음들이 다 있지요. 나답게 사는 것. 나를 위해서 사는 것.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아름답다'는 말의 시작은 '아름'이 '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익숙하고, 우리의 귀에는 좋게 들립니다. 우리를 위로하기도 합니다. 나다운 것을 찾기 위해서 노력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뛰어넘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미 정체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눈치챌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복음이라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 위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을 통해서 내게 무엇이 변했고, 무엇을 얻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로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너'를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선을 악으로 갚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 의도가 지나치게 쉽게 뒤집어지고, 오해되고, 무너지게 됩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나 하나쯤' 그렇게 살아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고난을 감수하면서까지도 그렇게 살아갈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살아가셨고, 우리가 가진 소망이 우리의 삶을 다 헤아리실 그 분께 드리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세상에서, 고난을 감수하더라도 기꺼이 두려워하지 말고 선을 행하는 삶이 됩시다.
3 months ago | [YT]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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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주님의교회
복음은 단지 구원의 소식일 뿐만 아니라, 그 구원이 우리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실현되는지 보여주는 삶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가볍지 않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은 "값싼 은혜는 죄를 인정하지만 죄를 회개하지 않는 은혜이며, 십자가를 말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은혜이다."라고 말하셨습니다. 참된 은혜는 언제나 변화와 순종을 동반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편지의 독자들에게 복음을 받은 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의 내밀한 관계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부부의 관계와 가까운 관계들 속에서 마음을 같이하 고,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고 겸손하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씀은 단순히 도덕적인 권면이 아닙니다. 복음을 통해서 새롭게 된 자들에게 마땅히 나타나야 할 열매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은 주님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벧전3:12). 진정한 사랑과 순종은 먼 곳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익숙한 관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가족, 친구,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때로 갈등하고, 상처 받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관계 안에서부터 그리스도서 우리를 참아주시고 용납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 분의 능력 안에서 사랑을 선택해야 합니다.
선택할 수 있습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방식이며,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는 증거입니다. 순종은 억지로 눌리며 감당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기꺼이 따르는 자유의 선포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의 가장 가까운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피어나기를 바랍니다. 값없이 받은 은혜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그 은혜의 무게를 기억하며 사랑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말 한 마디, 태도 하나, 마음 씀씀이 속에서 사랑의 몸짓이 피어나기를 바랍니다.
3 months ago | [YT]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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