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수는 늘 그것이 심장과 눈물을 섞은 색 같다고 생각했다. 투명한 액체가 가득 담긴 갈색 약병과, 각각 묵과 해수의 피가 담긴 시험관 두 개. 바닥에 눌어붙은 자국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뿐인 해수의 시험관과 달리, 묵의 것은 꽉 차 있었다. 해수는 아주 약간의 기대를 하면서, 찬장과 묵을 번갈아 쳐다봤다. 묵은 거실 소파에 앉아 무료하게 티비를 보고 있었다. 달리 방법은 없었다. 해수는 제 방으로 가 반짇고리를 가져왔다. 그리고 바늘을 꺼내 손가락을 찔렀다. 해수의 피가 투명한 액체에 떨어졌다.
마셔, 해수가 건넸다. 묵은 약을 단숨에 털어 넣고는 해수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해수는 묵의 입술이 닿은 곳을 매만지면서, 아침에도 먹었니, 하고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묵이 고개를 끄덕이며 해수의 볼을 감쌌다. 묵의 입술이 해수의 오른쪽 눈꺼풀에 꽤나 오래 머물렀다. 묵은 짠맛이 감도는 입술을 훑고는 왼쪽 눈꺼풀과 코에도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해수는 묵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묵의 입술을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묵은 슬쩍 웃으며 해수를 천천히 안아들었다. 두 사람이 좁은 소파에 함께 쓰러졌다. 티비는 밤새 켜져 있었다.
먼저 몸을 일으킨 건 언제나처럼 해수였다. 해수는 여태 자는 묵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그날을 떠올렸다. 그날의 묵을 떠올리면 아직도 심장이 쿵쿵 내려앉았다. 그러면 가슴께가 텅 비어왔다. 벌써 세 달이었다. 아니, 사실은 잘 모르겠다. 피를 뽑아주기 시작한 것이 세 달째니 묵이 약에 중독된 것만 세 달일 뿐이었다. 그 전에 묵이 대체 언제부터 얼마나 자주 약을 먹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해수는 무서워서 묻지 않았고, 묵은 미안해서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사랑해서 묻지 않았는지도, 그리고 사랑하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묵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해수가 알았을 뿐이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 잠깐 눈을 뜬 밤이었다. 묵이 화장실에서 제 목구멍에 손까지 집어넣고는 꺽꺽 물을 게워내고 있었다. 해수는 혹여 체했나 싶어 묵의 등을 다정하게 쓸어내렸지만, 묵은 해수를 거칠게 뿌리쳤다. 악을 쓰면서 다 질린다고 당장 나가라고 엉엉 울어댔다. 해수도 낯선 묵의 모습에 너무 놀라 울어버렸다. 묵에게는 의외로 무정한 구석이 있어서 그게 가끔 해수를 서운하게는 했지만 그가 소리를 지른 건 처음이었다. 그날 밤, 묵은 문을 잠그고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해수도 화장실 문 앞에 주저앉아 밤을 꼬박 새웠다. 묵이 울다가 다시 게워내기를 반복하는 소리를 전부 들으면서, 해수는 묵이 뱉어낸 물의 정체를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 리머런스?
- 응, 말하자면 사랑의 묘약 같은 거래.
처음엔 믿지 않았다. 사랑의 묘약이라니. 삼류 로맨스 소설에나 나올 법한 물건이었다. 심지어 그런 소설에 나와도 식상할 것 같은, 그런 물건. 하지만 머지않아 정말로 리머런스 열풍이 불었다. 가장 먼저 묘약에 마음을 기댄 것은 혼자만의 사랑을 머금은 이들이었다. 미지의 약물에 자신의 마음을 걸어볼 만큼 간절한 이들. 그들이 밝힌 소감은 확실했다. 약을 마시고 처음 눈을 맞춘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사랑을 느끼고, 약효가 드는 동안 이어진 사랑의 기억이 오랜 관계의 물꼬를 터준다는 것이었다. 해수처럼 설마 하던 사람들도 입소문을 듣고 관심을 가졌다. 말마따나 약효가 무척 강하지도 유효기간이 그다지 길지도 않아서 너나할 것 없이 약국에 줄을 섰다. 그 중엔 사는 게 퍽퍽해 연모의 마음이 도무지 생겨나질 않는다는 이들과 그 마음이 너무 낯익어 신선한 자극이 필요하다는 이들, 그러니까 직접 먹으려는 사람도 많았다.
묵도 엄청난 흥미를 보였다. 해수는 묵에게 단단히 일렀다.
- 묘약을 먹여서 쟁취하는 사랑에 무슨 의미가 있어? 어차피 가짠데.
- 그래도 사랑이 생기잖아.
- 우리는 이미 사랑이 있잖아.
- 더 짜릿하지 않을까?
아야. 묵이 이마를 문지르며 해수에게 눈을 흘겼다. 해수는 넌 맞아도 싸, 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해수와 묵은 그런 것 없이도 여전히 말갛게 사랑하고 있었다. 해수는 그렇게 믿었었다.
세상은 금세 무언가에 열렬히 도취되어 갔다. 약인지 사랑인지 사랑하는 마음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 번 리머런스에 손을 댄 이들은 멈추지 않고 계속 마셔댔다. 해수의 주변에도 연인과 나눠 마셨다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사랑의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점점 더 강력한 약을 원했다. 곧 새로운 약이 나왔다. 모양은 원래의 것과 같았다. 갈색 병에 담긴 투명한 약물. 다만 이번에 필요한 것은 상대의 눈동자가 아니라 혈액이었다. 눈맞춤이 아니라 상대의 피를 섞어 마셔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약의 표적이 정확해져서 이미 내성이 생겨버린 중독자들도 다시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피를 타 마셔야 하는 건 이전보다 훨씬 번거로웠지만 불만을 표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처음에는 몰래 물에 타고 음식에 뿌리던 것이 이미 공연해진 지 오래였다. 어차피 대부분의 중독자들은 서로 약을 나누어 마시고 있었으니, 연인의 피를 타 마시는 건 오히려 퍽 낭만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던 것이다. 손을 잡고 함께 피를 뽑고, 그 피를 섞은 잔을 엇갈리게 꺾어 마시는 것이 이제는 일종의 의례가 되어갔다.
약물에 입도 대보지 않은 건 정말로 너희밖에 없을 거라며 해수의 친구는 타박을 주었다. 해수는 약을 끊으려는 노력이라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되려 제안을 했다. 그러나 친구는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하는 동그란 눈을 하고 깔깔 웃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이제 그것 없이는 제 연인과 혀를 섞고 몸을 섞어도 무감각해서, 그걸 마실 수밖에 없다고. 처음에는 싸우기도 많이 싸웠으나 결국에는 둘 다 마시고 있으니 이제는 그냥 당연하게 여기기로 했다고. 그래놓고 친구는 망설임 끝에 너희는 절대 마시지 마, 하는 당부를 덧붙였다.
친구의 씁쓸한 표정이 밤새 떠올랐다. 묵은 화장실 안에서 지쳐 잠에 든 것 같았다. 해수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우당탕 큰 소리가 나더니 달칵 잠금이 풀렸다. 해수는 문을 열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묵의 얼굴은 눈물인지 토사물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덕지덕지 눌러 붙어 엉망이었다.
- 왜 뱉었어.
해수가 물었다. 마신 이유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묵이 그걸 왜 토해냈는지, 이미 먹은 건데 제 속을 헤집어가면서까지 그걸 왜 게워냈는지, 해수는 그걸 알고 싶었다.
- 너를 사랑하고 싶어서.
묵이 말했다. 그건 아마 해수가 가장 듣고 싶었으면서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대답이었을 것이다. 해수는 갑자기 올라오는 메스꺼움에 토악질을 했다. 묵은 어젯밤 해수가 그랬던 것처럼 해수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여주었다. 그래놓고는 하나도 다정하지 않은 말을 했다. 한 번 마시니까 멈출 수가 없었고, 이제는 마셔도 심장이 뛰질 않아서 겁이 났다고. 그리고 나눴던 대화와 일어났던 일들은 잘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때의 망연함만이 어렴풋이 욱신거릴 뿐이었다.
묵은 줄곧 해수를 사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해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대답이 해수에게는 더 잔인했다. 해수는 묵이 죄책감 때문에 자기를 받아주고 있다고 생각했고, 묵은 해수가 미련 때문에 자기를 간신히 붙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해수도, 묵도 서로를 놓지 못했다. 그날 밤부터 오늘까지, 세 달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해수는 그동안 열 번도 넘게 묵을 떠났고, 열한 번도 넘게 돌아왔다. 묵은 떠나는 해수를 한 번도 붙잡지 않았지만, 해수가 돌아와 손을 내밀면 못 이기는 척 해수의 손을 꽉 쥐었다.
그러니 두 사람의 재회는 으레 이런 식이었다. 해수가 돌아와서 제 피를 약에 타주면, 묵은 그걸 마시고, 해수에게 입을 맞추고, 두 사람이 함께 눕고. 그렇게 묵과 정신없는 밤을 보내고 난 다음날 아침이면 해수는 어김없이 묵을 바라보며 우두망찰을 했다. 수없이 반복해도 도통 익숙해지질 않았다. 다시 와서 묵의 손을 잡는 것도, 묵을 안고 함께 잠에 드는 것도 전부 당연했는데. 제 피를 탄 물약을 묵에게 건네는 것만큼은 그렇질 못했다. 그건 할 때마다 온 몸이 떨려왔다.
어젯밤은 더 그랬다. 해수의 피가 없었다. 묵은 본래 해수가 없는 동안엔 약을 마시지 않았으니 일주일 전 묵을 떠난 날 남아 있었던 피는 그대로 있어야 했다. 묵이 갑자기 그걸 왜 마셨을까. 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는 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해수는 지난 날들을 떠올렸다. 잔뜩 취해 처음 약을 마신 게 언제인지 추궁하는 해수에게, 그게 중요하냐며 항상 진심이었다고 허탈한 대답을 내놓았던 묵을. 그러나 약효가 떨어질 때마다 묵이 쏟아내었던 날카로운 말들을. 그 말에 찔린 상처로 묵을 위한 약을 탔던 저를. 약을 마시기 전 늘 겁에 질려 있었던 묵의 눈을. 저를 사랑하고 싶어서 약을 게워내고 있었다던 그날 밤을.
사랑하고 싶어서…
심장이 마구 뛰었다. 해수는 알았다. 지금이었다. 낡을 대로 낡은 관계에 언젠가 오리라 생각했던 그 순간이었다. 대체 언제일까 싶었던 수없는 한탄이 무색하리만치 명확했다. 심장은 마구 뛰었고 손도 덜덜 떨렸지만 마음만은 고요했다. 찬장으로 내딛는 발걸음도, 갈색 병을 꺼내 남은 물약을 전부 따라내고 묵의 피를 섞는 손가락도 전부 단단했다. 해수는 눈을 똑바로 뜨고 물약을 왈칵 마셨다. 다시 보니 묵의 뺨 색깔 같기도 하네, 실없는 생각을 하며 웃기까지 했다. 한 모금을 마시고 나니 그 다음은 쉬웠다. 해수는 잔을 남김없이 비우고 입가에 묻은 약물을 혀로 깨끗하게 쓸어냈다.
묵은 뒤척이고 있었다. 해수는 묵이 누운 소파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묵의 새하얀 이마와 뺨을, 예쁜 눈썹과 쌍꺼풀을 마치 처음 만져보듯 쓰다듬었다. 해수의 손길에 묵이 눈을 뜨자, 그대로 묵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댔다. 웅얼거리며 잠깐 밀어내던 묵도 그대로 해수를 받아들였다.
Seongbeen, The Mournful Child
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이번 플레이리스트 '너를 딱 적당히만 사랑했어야 했는데'는 미니픽션 문예잡지인 '선뜻'과 함께합니다.
아래 선뜻에서 보내주신 미니픽션과 함께 감상하시면 정말 좋을 거 같아요!
선뜻에서는 이처럼 좋은 미니픽션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으니 한번 둘러보시는 게 어떨까요?
- 선뜻 인스타그램:
www.instagram.com/sunddeut/
다들 코로나 조심하시고 픽션 속 주인공들처럼 안온한 사랑이 함께하는 일상이 되시길 바래요!
해수는 늘 그것이 심장과 눈물을 섞은 색 같다고 생각했다. 투명한 액체가 가득 담긴 갈색 약병과, 각각 묵과 해수의 피가 담긴 시험관 두 개. 바닥에 눌어붙은 자국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뿐인 해수의 시험관과 달리, 묵의 것은 꽉 차 있었다. 해수는 아주 약간의 기대를 하면서, 찬장과 묵을 번갈아 쳐다봤다. 묵은 거실 소파에 앉아 무료하게 티비를 보고 있었다. 달리 방법은 없었다. 해수는 제 방으로 가 반짇고리를 가져왔다. 그리고 바늘을 꺼내 손가락을 찔렀다. 해수의 피가 투명한 액체에 떨어졌다.
마셔, 해수가 건넸다. 묵은 약을 단숨에 털어 넣고는 해수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해수는 묵의 입술이 닿은 곳을 매만지면서, 아침에도 먹었니, 하고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묵이 고개를 끄덕이며 해수의 볼을 감쌌다. 묵의 입술이 해수의 오른쪽 눈꺼풀에 꽤나 오래 머물렀다. 묵은 짠맛이 감도는 입술을 훑고는 왼쪽 눈꺼풀과 코에도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해수는 묵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묵의 입술을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묵은 슬쩍 웃으며 해수를 천천히 안아들었다. 두 사람이 좁은 소파에 함께 쓰러졌다. 티비는 밤새 켜져 있었다.
먼저 몸을 일으킨 건 언제나처럼 해수였다. 해수는 여태 자는 묵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그날을 떠올렸다. 그날의 묵을 떠올리면 아직도 심장이 쿵쿵 내려앉았다. 그러면 가슴께가 텅 비어왔다. 벌써 세 달이었다. 아니, 사실은 잘 모르겠다. 피를 뽑아주기 시작한 것이 세 달째니 묵이 약에 중독된 것만 세 달일 뿐이었다. 그 전에 묵이 대체 언제부터 얼마나 자주 약을 먹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해수는 무서워서 묻지 않았고, 묵은 미안해서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사랑해서 묻지 않았는지도, 그리고 사랑하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묵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해수가 알았을 뿐이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 잠깐 눈을 뜬 밤이었다. 묵이 화장실에서 제 목구멍에 손까지 집어넣고는 꺽꺽 물을 게워내고 있었다. 해수는 혹여 체했나 싶어 묵의 등을 다정하게 쓸어내렸지만, 묵은 해수를 거칠게 뿌리쳤다. 악을 쓰면서 다 질린다고 당장 나가라고 엉엉 울어댔다. 해수도 낯선 묵의 모습에 너무 놀라 울어버렸다. 묵에게는 의외로 무정한 구석이 있어서 그게 가끔 해수를 서운하게는 했지만 그가 소리를 지른 건 처음이었다. 그날 밤, 묵은 문을 잠그고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해수도 화장실 문 앞에 주저앉아 밤을 꼬박 새웠다. 묵이 울다가 다시 게워내기를 반복하는 소리를 전부 들으면서, 해수는 묵이 뱉어낸 물의 정체를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 리머런스?
- 응, 말하자면 사랑의 묘약 같은 거래.
처음엔 믿지 않았다. 사랑의 묘약이라니. 삼류 로맨스 소설에나 나올 법한 물건이었다. 심지어 그런 소설에 나와도 식상할 것 같은, 그런 물건. 하지만 머지않아 정말로 리머런스 열풍이 불었다. 가장 먼저 묘약에 마음을 기댄 것은 혼자만의 사랑을 머금은 이들이었다. 미지의 약물에 자신의 마음을 걸어볼 만큼 간절한 이들. 그들이 밝힌 소감은 확실했다. 약을 마시고 처음 눈을 맞춘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사랑을 느끼고, 약효가 드는 동안 이어진 사랑의 기억이 오랜 관계의 물꼬를 터준다는 것이었다. 해수처럼 설마 하던 사람들도 입소문을 듣고 관심을 가졌다. 말마따나 약효가 무척 강하지도 유효기간이 그다지 길지도 않아서 너나할 것 없이 약국에 줄을 섰다. 그 중엔 사는 게 퍽퍽해 연모의 마음이 도무지 생겨나질 않는다는 이들과 그 마음이 너무 낯익어 신선한 자극이 필요하다는 이들, 그러니까 직접 먹으려는 사람도 많았다.
묵도 엄청난 흥미를 보였다. 해수는 묵에게 단단히 일렀다.
- 묘약을 먹여서 쟁취하는 사랑에 무슨 의미가 있어? 어차피 가짠데.
- 그래도 사랑이 생기잖아.
- 우리는 이미 사랑이 있잖아.
- 더 짜릿하지 않을까?
아야. 묵이 이마를 문지르며 해수에게 눈을 흘겼다. 해수는 넌 맞아도 싸, 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해수와 묵은 그런 것 없이도 여전히 말갛게 사랑하고 있었다. 해수는 그렇게 믿었었다.
세상은 금세 무언가에 열렬히 도취되어 갔다. 약인지 사랑인지 사랑하는 마음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 번 리머런스에 손을 댄 이들은 멈추지 않고 계속 마셔댔다. 해수의 주변에도 연인과 나눠 마셨다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사랑의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점점 더 강력한 약을 원했다. 곧 새로운 약이 나왔다. 모양은 원래의 것과 같았다. 갈색 병에 담긴 투명한 약물. 다만 이번에 필요한 것은 상대의 눈동자가 아니라 혈액이었다. 눈맞춤이 아니라 상대의 피를 섞어 마셔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약의 표적이 정확해져서 이미 내성이 생겨버린 중독자들도 다시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피를 타 마셔야 하는 건 이전보다 훨씬 번거로웠지만 불만을 표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처음에는 몰래 물에 타고 음식에 뿌리던 것이 이미 공연해진 지 오래였다. 어차피 대부분의 중독자들은 서로 약을 나누어 마시고 있었으니, 연인의 피를 타 마시는 건 오히려 퍽 낭만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던 것이다. 손을 잡고 함께 피를 뽑고, 그 피를 섞은 잔을 엇갈리게 꺾어 마시는 것이 이제는 일종의 의례가 되어갔다.
약물에 입도 대보지 않은 건 정말로 너희밖에 없을 거라며 해수의 친구는 타박을 주었다. 해수는 약을 끊으려는 노력이라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되려 제안을 했다. 그러나 친구는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하는 동그란 눈을 하고 깔깔 웃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이제 그것 없이는 제 연인과 혀를 섞고 몸을 섞어도 무감각해서, 그걸 마실 수밖에 없다고. 처음에는 싸우기도 많이 싸웠으나 결국에는 둘 다 마시고 있으니 이제는 그냥 당연하게 여기기로 했다고. 그래놓고 친구는 망설임 끝에 너희는 절대 마시지 마, 하는 당부를 덧붙였다.
친구의 씁쓸한 표정이 밤새 떠올랐다. 묵은 화장실 안에서 지쳐 잠에 든 것 같았다. 해수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우당탕 큰 소리가 나더니 달칵 잠금이 풀렸다. 해수는 문을 열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묵의 얼굴은 눈물인지 토사물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덕지덕지 눌러 붙어 엉망이었다.
- 왜 뱉었어.
해수가 물었다. 마신 이유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묵이 그걸 왜 토해냈는지, 이미 먹은 건데 제 속을 헤집어가면서까지 그걸 왜 게워냈는지, 해수는 그걸 알고 싶었다.
- 너를 사랑하고 싶어서.
묵이 말했다. 그건 아마 해수가 가장 듣고 싶었으면서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대답이었을 것이다. 해수는 갑자기 올라오는 메스꺼움에 토악질을 했다. 묵은 어젯밤 해수가 그랬던 것처럼 해수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여주었다. 그래놓고는 하나도 다정하지 않은 말을 했다. 한 번 마시니까 멈출 수가 없었고, 이제는 마셔도 심장이 뛰질 않아서 겁이 났다고. 그리고 나눴던 대화와 일어났던 일들은 잘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때의 망연함만이 어렴풋이 욱신거릴 뿐이었다.
묵은 줄곧 해수를 사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해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대답이 해수에게는 더 잔인했다. 해수는 묵이 죄책감 때문에 자기를 받아주고 있다고 생각했고, 묵은 해수가 미련 때문에 자기를 간신히 붙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해수도, 묵도 서로를 놓지 못했다. 그날 밤부터 오늘까지, 세 달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해수는 그동안 열 번도 넘게 묵을 떠났고, 열한 번도 넘게 돌아왔다. 묵은 떠나는 해수를 한 번도 붙잡지 않았지만, 해수가 돌아와 손을 내밀면 못 이기는 척 해수의 손을 꽉 쥐었다.
그러니 두 사람의 재회는 으레 이런 식이었다. 해수가 돌아와서 제 피를 약에 타주면, 묵은 그걸 마시고, 해수에게 입을 맞추고, 두 사람이 함께 눕고. 그렇게 묵과 정신없는 밤을 보내고 난 다음날 아침이면 해수는 어김없이 묵을 바라보며 우두망찰을 했다. 수없이 반복해도 도통 익숙해지질 않았다. 다시 와서 묵의 손을 잡는 것도, 묵을 안고 함께 잠에 드는 것도 전부 당연했는데. 제 피를 탄 물약을 묵에게 건네는 것만큼은 그렇질 못했다. 그건 할 때마다 온 몸이 떨려왔다.
어젯밤은 더 그랬다. 해수의 피가 없었다. 묵은 본래 해수가 없는 동안엔 약을 마시지 않았으니 일주일 전 묵을 떠난 날 남아 있었던 피는 그대로 있어야 했다. 묵이 갑자기 그걸 왜 마셨을까. 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는 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해수는 지난 날들을 떠올렸다. 잔뜩 취해 처음 약을 마신 게 언제인지 추궁하는 해수에게, 그게 중요하냐며 항상 진심이었다고 허탈한 대답을 내놓았던 묵을. 그러나 약효가 떨어질 때마다 묵이 쏟아내었던 날카로운 말들을. 그 말에 찔린 상처로 묵을 위한 약을 탔던 저를. 약을 마시기 전 늘 겁에 질려 있었던 묵의 눈을. 저를 사랑하고 싶어서 약을 게워내고 있었다던 그날 밤을.
사랑하고 싶어서…
심장이 마구 뛰었다. 해수는 알았다. 지금이었다. 낡을 대로 낡은 관계에 언젠가 오리라 생각했던 그 순간이었다. 대체 언제일까 싶었던 수없는 한탄이 무색하리만치 명확했다. 심장은 마구 뛰었고 손도 덜덜 떨렸지만 마음만은 고요했다. 찬장으로 내딛는 발걸음도, 갈색 병을 꺼내 남은 물약을 전부 따라내고 묵의 피를 섞는 손가락도 전부 단단했다. 해수는 눈을 똑바로 뜨고 물약을 왈칵 마셨다. 다시 보니 묵의 뺨 색깔 같기도 하네, 실없는 생각을 하며 웃기까지 했다. 한 모금을 마시고 나니 그 다음은 쉬웠다. 해수는 잔을 남김없이 비우고 입가에 묻은 약물을 혀로 깨끗하게 쓸어냈다.
묵은 뒤척이고 있었다. 해수는 묵이 누운 소파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묵의 새하얀 이마와 뺨을, 예쁜 눈썹과 쌍꺼풀을 마치 처음 만져보듯 쓰다듬었다. 해수의 손길에 묵이 눈을 뜨자, 그대로 묵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댔다. 웅얼거리며 잠깐 밀어내던 묵도 그대로 해수를 받아들였다.
- 사랑해.
해수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묵은 멍하니 현관을 바라보았다.
「마음짓기」
글쓴이: 펜나
4 years ago | [YT] |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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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gbeen, The Mournful Child
저는감자애요 해해
5 years ago | [YT] | 232
View 35 replies
Seongbeen, The Mournful Child
텀블벅에서 인디 음악 잡지 펀딩을 진행하고 있어요!
제가 진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 인터뷰도 들어있답니다 😙
(다른 플레이리스트 유튜버 몇 분의 인터뷰도 😋)
인디 음악과 밴드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 읽으시면 정말 흥미로울 내용도 많고, 다들 아실만한 아티스트 분들의 인터뷰도 포함되어 있어요! (사뮈, 406호프로젝트, 참솜 등 ...)
개인적으로 국내 인디씬을 매우매우.. 사랑하고 성장하기를 기대하고 있기에 이런 식의 인디 관련 펀딩이 많아졌음 하는 바램이네요 😊
tumblbug.com/37b985aa-8dc0-4d23-b945-86fb5649b449
5 years ago | [YT] | 171
View 8 replies
Seongbeen, The Mournful Child
[무엇이든 물어봐주세요!]
안녕하세요! 다들 즐거운 연휴 보내시고 계신가요 😆
얼마전에 구독자 2만명이 넘기도 했고, DM이나 댓글로 채널과 저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으셔서, 일괄적으로 대답해드리고자 채널 소개 영상을 하나 업로드 해두려고 해요.
그래서 난생 처음 QnA를 해보려고 하는데, 질문들은 천천히 모아서 한꺼번에 대답 해드릴게요!
(이후에 업로드되는 플레이리스트에도 관련 공지를 추가할게요 😋)
여기 댓글이나 채널 영상의 댓글로, 아무거나 질문해주시면 좋을거 같아요! 혹은 제 인스타의 스토리에 질문 남겨주셔도 좋아요! (인스타그램 아이디: @seongbeen_the_mournful)
무엇이든 좋으니 마구마구 질문 폭행 해주세요😉
#개수상관X
(딱히 올릴 사진이 없어서 옛날 사진 올립니다 총총,,)
5 years ago (edited) | [YT] |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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