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그라프

안녕하세요, 여러분.
페이지그라프 입니다.

벨기에에서 마지막으로 보내는 포스트입니다.
지난 3년 동안, 합법적으로 종이를 갈퀴로 긁어모아오던 저는
그 업보를 집을 정리하며 돌려받고 있습니다.
이미 저에게는 죽기전까지 다 쓰지 못할 종이가 있는 것 같아요.

모아둔 종이를 하나 둘, 정리하고 다른 종이에 붙이면서 한편으로는
제가 종이를 정말 사랑한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포장지의 어느 한 귀퉁이를 찢어낸 조각도
언제 어디서 왜 그 종이를 간직하고자 남겼는지가 기억이 다 나더라고요.

지난 토요일은 제가 다니는 제본 박물관에 작은 전시가 있었습니다.
반년의 코스를 마무리하는 말 그대로의 책걸이 전시였는데
학예회 재롱잔치를 생각하고 갔던 저에게는 조금 충격이었어요.

지금까지 저는 책의 외면, 내구성, 종이 종류 같은 것에 집중했고
앞으로의 이야기가 쓰여질 책을 만들었습니다.
사용자는 저고, 제 욕구가 최우선 고려순위 였어요.

그렇지만 전시의 다른 책들은 저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있더군요.
안에 담긴 이야기와 바깥의 모양새가 일치해 안과밖, 모두를 고려한 책은
기성품 노트와 경쟁하려 했던, 가성비를 찾았던 지난 반년의 저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돌아가서 지금처럼은 자유롭게 제본할 수 없겠지만
나름대로의 방향성을 찾은 기분이었어요.

이야기를 기다리는 책 말고
이야기를 말하는 책을 만들자.

3년전 장소가 바뀌어도 사람은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진화했습니다.

한국에서 종이 쪼가리를 격하게 좋아한다는 이유로 시작했고
벨기에에서 역시나 같은 이유로 계속 되었던 이야기는
한국에 돌아가서도 여전히 계속될 예정입니다.

사람으로는 끊임없는 연기와 유보와 같았던 시간에
함께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라는 말이 지겹지만, 덕분에 잘 진화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격하게 종이쪼가리를 좋아하는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페이지그라프 드림.

1 year ago | [YT] | 85